최고의 교사-심승현 선생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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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늘 가졌던 질문입니다. 특수교육에 발을 들여놓고 10여년이 지나서야 코르착의 책을 만났고, 그의 책 제목은 제 고민과 일치했습니다. 코르착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가장 첫번째 출발점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모른다.'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여러번 코르착의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학부모나 두 아들놈이나 아내 등 나와 관계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깨달은 것은 '정말 모른다.'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끝 모를 질문,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와 답을 찾지 못하는 자의 고민이 또 시작됩니다.


   추측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이나 모두 사람이기에 함께 만나는 과정 속에서 희노애락을 공유하게 됩니다.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어떤 때는 기쁘기도 하고(아이들이 조금씩 좋아지는 모습을 볼 때 등), 어떤 때는 화내기도 하며(‘너무 너 밖에 모르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 등), 어떤 때는 슬퍼서 가슴이 짠하다가(인연 있는 아이들이 먼저 하늘나라로 갔을 때 등) 또 금방 혼자 실실 웃기도(아이들의 뻔한 수에 넘어가 줄 때 등...) 합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선생님과 같이 생활하면서 이 같은 감정들이 오르고 내릴 것입니다. 사람의 삶은 그가 누구이던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나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더 나아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삶의 더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저도 부모이지만, 부모로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과 가르치는 이로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것일까요? 장애를 가진 아이와 장애를 가지지 않은 아이에 대한 사랑이 다른 것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늙던, 젊던, 병들던, 건강하던, 장애가 있던, 없던.... 그 모두가 사람이기에 사람의 감정이나 사랑은 같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뿐입니다.

   사람, 관계

   모습과 연령, 지적 상태와 신체 상황이 모두 다르지만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의 모습을 지닐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 사랑하려는 사람의 중요한 덕목은 ‘사람’에 대한 이해일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거나, 양육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나름대로”라도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열 길 물 곳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늘 사람을 만나지만 정작 그 사람을 잘 모르고 삽니다. 지구를 구성하는 한 족속으로서의 ‘사람’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형제, 친구 등 매 순간 만나는 개인에 대해서조차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살아가면서 함께 하는 사람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감정과 현상이 ‘그’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할 때 ‘관계’에 집착합니다. 
   관계는 소통이 없는 관계와 소통이 있는 관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아파트에서 같은 층에 몇 년을 같이 살면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수 없이 같이 타고 다녀도 말 한마디 섞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소통이 없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데, 어떤 관계가 형성되는지 물을지 모르지만, 말이나 몸짓을 나누지 않아도 관계는 형성됩니다. 엘리베이터 속의 예처럼 말 한마디 섞지 않는다 하더라고 같은 공간에 함께 있으면 사람의 마음은 여러 가지의 감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이나 몸짓을 나누지 않는 출퇴근 버스나 지하철 속의 여러 사람들과도 소통없는 관계는 형성됩니다. 반면, 길거리에서 만나 길을 묻더라도 한마디의 말이나 몸짓을 서로 나누게 된다면 소통이 있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소통하는 관계던, 소통하지 않는 관계던 관계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관계를 형성하려 할까요? 이 질문은 ‘사람은 무엇을 바라며 살아갈까요?’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행복

   하늘의 별처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그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가 아닌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려 하고, 그 관계 속에서 어떤 삶을 바라며 살고자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바라며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처지와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 무엇 속에는 반드시 ‘행복1)’한 삶에 대한 바람이 있습니다.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국가, 개인, 민족 등 행복의 대상이 다를 수 있지만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관계’입니다. 사람간의 관계, 삶의 바람은 ‘행복’이라는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행복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 형제, 부자 등 사람의 많은 관계가 있지만 실제 그 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를 온전하게 알아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스스로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다 알아줄 수 없고,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내 마음을 다 알아 줄 수도 없습니다. 이는 이문구의 ‘새’2)라는 동시처럼 아무리 새가 예쁘고 아름다워도 ‘듣는 사람이 새가 아니’기에 그 새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와 그는 다른 우주를 만들고 다른 우주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상대방을 알아주려는(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람은 함께 살아갈 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알기 위한 ‘노력’. 저는 이것이 "사회적 관계 속의 사랑"이라 생각합니다.(부모와 자식, 형제 등 천륜-天倫- 으로서의 사랑은 사회적 관계의 사랑과 출발점이 다르며, 사회적 관계의 사랑을 아우르지만 속성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진정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입장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에게 진정 아이들을 사랑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학생의 입장을 알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 노력 위에서 학습활동이 나오며, 그 노력 위에서 생활지도, 인성지도 등 여러 교육적인 활동들이 나옵니다.3)
   진정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대방의 입장”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입장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당연히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라고 볼 수 있는데, 저는 이를 좀 더 풀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형성하여 진정한 사람으로 사람들 속에서 함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기본적인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으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권리, 인권입니다.(앞으로 기술되는 인권은 이 의미의 인권입니다.) 인간을 인간일 수 있도록 하는 인권을 이해할 때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없이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인권이란 말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족, 국가, 단체, 조직 등 특정 집단 다수의 행복을 위해 개인의 행복(위에서 정의한 인권입니다.)을 억압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90년대 이전의 독재정권이나 나치와 같은 민족우월주의, 가사일의 편중이나 생리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우월주의, 생김새나 지적 차이로 인한 차별 등 특정 집단 다수의 인권을 위한 소수의 억압은 우리가 많이 보아온 인권 침해의 사례들입니다. 
   그와 반대로 개인(또는 특정집단)의 행복을 위해 다수의 행복을 침해하는 것도 폭력입니다.  자본과 권력, 언론을 가진 특정인을 위해 조직적으로 다수의 눈을 멀게 하거나 침묵을 강요하는 것도 같은 폭력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다수의 행복을 위한 개인의 인권침해와 더불어, 개인의 행복을 위한 다수의 인권침해도 함께 일어납니다. 물론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많이 일어나지만 사회적 힘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데서 둘은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권침해는 사회적 약자에게 일어납니다.4또한, 사람간의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사람간의 관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사회구조 또한 인권을 훼손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노력

   그렇다면 발달장애 아이들의 인권(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형성하며 진정한 사람으로 사람들 속에서 함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기본적인 권리)을 보장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동등한 사람”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성질(성 性)을 가지고 있으며 발달과 관련된 장애가 있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정서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부모나 교사처럼 자존심이 있으며 강요된 복종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등한 사람”에 대한 이해는 발달장애 아이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기초입니다. “원래” 그런 아이(사람)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정서와 마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 폭과 깊이가 다를 뿐.
   두 번째, 적절한 대화와 긴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연애를 해 봤습니다. 연애의 기초는 소위 “밀당”이라고 하죠. 밀고 당기기. 우리 아이들이 사람들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밀당을 잘 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대화와 긴장이라고 부릅니다. 
   아이의 편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주변을 봄으로써 아이의 현재 삶을 있는 그대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대화라 할 수 있으며 아이가 특정 시점에 머물지 못하도록 환시시켜 주는 것을 긴장이라고 합니다. 적절한 긴장이 없다면 아이는 삶에 대한 방향을 잃게 되어 마음과 영의 자람이 미숙한 사람이 됩니다. 대화하는 것이 아이들의 현재를 잘 살피고 현재의 삶을 행복하게 살기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긴장은 아이의 미래를 예측하고 전 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긴장 없는 대화는 아이들 몸과 마음과 영의 조화로운 삶을 방해하게 되어 전 삶에 대한 방향을 잃게 만들며, 대화 없는 긴장은 아이들 몸과 마음과 영의 피폐함을 가져 옵니다.
   아이의 환경이나 상황을 잘 파악하여 있는 그대로 보장받게 하려는 노력(대화)과 아이가 특정 정신단계에 머무르기만 하며 “함께” 살아가기에 부적절한 행동을 할 때 개별의 수위에 알맞게 주위도 주고, 야단도 치는 노력(긴장)이 함께하지 않으면, 밀당에 서툴러 이루지 못한 첫사랑처럼 아이의 진정한 인권은 깨지게 됩니다.
   대화와 긴장의 예를 두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특수학교에서는 아이들의 건강검진을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건강검진을 하게 되면 한 반에 한 두명 정도의 아이와 씨름을 하게 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남자들이 한 아이를 붙잡고 엉켜 뒹굴거나 힘세고 덩치가 큰 학생은 팔과 다리 몸통 등을 대여섯명의 선생님들이 붙잡고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혈액검사를 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겁을 먹고 혈액검사를 하지 않으려고 몸을 마구 움직여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경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말로 잘 설명하고 혈액을 채취하면 되지, 뭘 그렇게... 아이들이 더 무서워하잖아...’
   라며 말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인들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미리 설명하고, 혈액검사를 잘 하는 학생들부터 불러 조금 따끔거린다는 것을 보여주어도 일부 학생들은 당장의 아픔(바늘이 들어가는 순간)을 참지 못합니다. 
   ‘아,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 혈액검사 하지 않으면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는 참으로 아이를 위하지 않는 한심한 생각입니다. 저는 그나마 학교에서 이렇게라도 혈액검사를 하는 것이 혈액검사를 하지 않아서 뒤늦게 질병이 발견되어 그 아이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보다 진심으로 아이의 인권을 지켜주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실 분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아이의 현재 삶에 대한 만족감을 보장하여 주사기를 무서워하는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대화)도 중요하지만, 만약에 있을 질병에 대비해 현재 삶에 만족감이 현저히 낮아지는 한이 있어도 혈액검사를 하는 것(긴장)도 중요합니다. 일상 속에서는 전자(대화하는 것)가 중요하지만 특별한 상황에서는 후자(긴장하는 것)가 더 중요합니다. 
   또 한 예로 주변 사람들을 때려 상해를 입히는 아이를 생각해 봅니다. 이 아이의 경우, ‘왜 그럴까?’에 대해 양육하는 자(부모), 가르치는 자(선생님), 사람의 심리와 병리에 대해 더 잘 아는 자(심리학자, 의사 등) 등이 함께 고민하여 아이를 이해하며 현재 삶의 만족감을 막는 원인을 찾아내야 합니다.(대화) 부모나 선생님 등 개별 주체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 관련 전문가들이 함께 원인을 규명하고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분명한 대처방법을 만들어야 합니다.5) 그리고 그것이 아이의 만족감을 불가피하게 일시적으로 제한한다고 하여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형성할 수 없게 만들어 진정한 사람으로 사람들 속에서 함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기본적인 권리에 많은 제약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보편적인 눈’입니다.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인권의 존립기반인 ‘사람들과의 관계형성’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사람들과의 관계형성’은 과제일 수 있습니다. 특히, 발달장애 아이들에게 이 과제는 평생의 노력으로도 풀 수 없는 무거운 것입니다. 발달장애 아이들이 가진 이 무거운 과제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읽으려는 눈을 가지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발달장애 아이들은 천사!’로 봐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발달장애 아이들은 천사’라는 말은 아이들을 바로 보는 눈을 멀게 하는 생각입니다. 위의 첫 번째 노력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등한 사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보편적인 눈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희노애락의 감정, 천사와 악마의 마음, 참말과 거짓말(말을 하는 아이의 경우), 성적(聖的)인 것과 성적(性的)인 것 등을 버무려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눈’을 가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질문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20년 묵은 질문을 다시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어줍잖은 고민이 답도 못 찾으면서 걸어온 내력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이다. 
사람은 저마다 품고 살아가는 바람은 다르지만 ‘행복’한 삶을 꿈꾸며 살아간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행복한 삶을 위해 서로 관계를 형성하고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우리 아이들이 이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서는 동등한 사람에 대한 이해, 대화와 긴장의 조화, ‘보편적인 눈’ 등에 대한 노력이 있어야한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데?
   아직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여전히 내 앞에 산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담임을 맡고 있는 각각의 아이들을 떠올리면 그 질문의 무게가 살아서 어깨를 짓누릅니다. 
   하지만 숨 쉴 공기와 볕으로 어김없이 아침을 열어주고, 깊은 안식을 위해 낮을 닫아주며, 만물이 자라게 비를 내리고 싹 틔우며 꽃과 열매를 선사하는 자연을 생각하면 그 질문의 무게를 덜 단서를 얻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낮과 밤은 함께 공존할 때 제 역할을 합니다. 낮과 밤이 공존할 때 비로소 햇볕은 은혜롭습니다.6) 그렇습니다.


<주석>

1. 행복 : 보통 행복이라 하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만족감을 이야기하지만 사전적 의미로는 “생활(삶)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행복에 대한 이야기도 그 내용이 많을 수 있지만 저는 간단하게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믿는 특정한 신(神)이 아닌 천지(天地) 즉, 자연입니다.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커 갈 때,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사람들 속에 있을 대, 사람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자존감을 느낄 때 행복합니다.

2. 이문구의 새 : 산에는 산새/들에는 들새/물에는 물새/들고 나는 새/하고 많아도/울음소리 예쁜 새는/열에 하나가 드물지./웬 일 이냐구?/이유는 간단해./듣는 사람이/새가 아니란 거야.(전문)

3.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을 알기 위한 깊고 지긋한 노력들보다 눈에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마치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웃으며 인사하는 점원들처럼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도 남에게 보이는 미소가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집니다.(물론, 내용과 형식이 같이 변화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변화이지만 사람사회의 여러 일들은 내용과 형식이 맞지 않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아이들을 이해하고 아이들의 입장에서 접근하려는 의도는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가르치는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평가에 갇혀 가르치는 사람들은 ‘현상’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 대화만 있을 뿐 긴장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고래를 향한 칭찬만 있을 뿐, 그 칭찬으로 춤추는 고래의 몸짓에 불편하거나 위협을 느끼는 주위의 작은 생명들에 대한 주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고래의 춤으로 힘들어하는 주위의 작은 생명들에게도 뭔가 칭찬할 것을 찾아 칭찬해 주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진정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 입장에서 사랑하기 어려운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4. 간혹, 덴마크의 영화 ‘더 헌트’처럼 사회적 약자라 일컫는 사람들로 인해 발생하는 인권침해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5. 이 대처방법은 좀 더 조직적이어야 합니다. 아이의 문제행동에 대해 전문가들이 충분히 분석하며 논의하여야 하며 가르치는 자와 양육하는 자는 그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방법은 원인에 따라 행동수정이 될 수도 있고, 약물을 통한 치료 등 다양한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6.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는 중용의 첫 장을 떠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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