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특수교육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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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랫만에 교육철학 관련 글들을 올립니다.

   특수교육도 교육입니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말입니다. 뻔한 이야기를 새삼 하는 것은 교육을 하는 사람들에게 철학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특수교육을 하는 분들을 포함해 아이들 앞에 "교육"이라는 것을 주제로 서는 모든 "선생님"들에게는 교육철학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나눔과 평화의 교육을 고민하시는 여러 선생님들께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음은 "지구화, 다문화사회 그리고 교육: 아시아의 교육"이라는 주제로 지난 2008년 교육철학회 주최로 열린 학술대회 자료입니다. 한글파일로 바꾸느라고 시간 좀 투자했습니다.^^



세계화 시대에 교양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모리미치 카토 (토호쿠대학교, 일본)

 

 

 

서론

 

이 논문의 목적은 세계화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방법에는 분명히 여러 가지가 있다. 한 가지 주된 방법은 세계화가 교육에 가져온 구체적인 세계화의 특징들과 문제들과 가능성들을 열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과학 및 교육과학적 접근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이상적으로는) 관련된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리하여 숫자로 제시하는 과학적절차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적절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경우, 우리가 상황을 이해하고 치유책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해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접근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 논문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바와 같이, 만일 현대 과학과 세계화가 동일한 과정의 쌍둥이 자매라면, 사회과학 및 교육과학을 포함한 현대 과학은 세계화의 성격과 본질을 충분히 깊

이 탐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세계화를 보다 넓은 관점, 즉 시공간적으로 현대 서구를 넘어서는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는 또 다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이고 간문화적인 관점을 가지는 철학적 접근이 될 것이다.

 

세계화: 과거와 현재

 

먼저 세계화에 대한 고찰을 한 후, 그것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볼 때, 세계화는 인간의 문화와 문명 발달에 내재된 과정인 것같이 보인다. 아시아에서의 불교의 전파 과정은 좋은 예이다. 좁은 의미에서의 종교뿐만이 아니라 음식, 의복, 건축, 문자, 요컨대 모든 삶의 양식은 세계화의 과정에 포함된다. 이러한 세계화가 배 만드는 기술의 진보에 의해 촉진되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이와 동등하게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세계화가 수면, 식사, 걷기, 건강과 병, 출생과 죽음 등과 같은 인간 신체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과정은 인간의 걸음의 속도를 능가할 수 없었다. 이와 더불어 세계화는 종종 높은 산, 큰 강, 바다와 사막과 같은 자연현상에 방해받기도 하고 굴복하기도 했다. 이것은 세계화의 과정을 매우 더디게 만들었다. 불교가 일본에 도달하는 데는 거의 천년이 걸렸다.

오늘날의 세계화는 완전히 다르다. 인류가 여전히 세계화 과정의 주역임에도 불구하고(적어도 그러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오늘날의 세계화는 인간 신체의 생체리듬과 거의 완전히 분리되었다. 예컨대 사업과 경제 세계를 보면, 미국에서 생긴 일이 아시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뉴욕에서 컴퓨터 마우스를 누른 것이 즉각 아시아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의 영향을 우리는 석유나 음식과 같은 상품의 하늘을 치솟는 가격에서 점점 더 느끼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두 가지 세계화 사이의 차이가 단순히 테크놀로지, 특히 우리 시대의 정보 테크놀로지의 진보에 의해 촉진된 양적인 문제라고 반대할지 모른다. 이러한 반대는 그것이 오늘날의 세계화에서 테크놀로지의 중요성을 적절히 인정한다는 점에서는(누가 그것을 부인하겠는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통적 기술(craft)과 현대 테크놀로지 사이의 근본적이 차이점을 간과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현대 테크놀로지는 고대의 테크네 혹은 기술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고대의 테크네는 자연의 모방으로 간주되었다. 반면에 비행기나 기관차와 같은 현대 테크놀로지는 오직 인간이 새나 말을 모방하는 것을 멈출 때 가능했다. 이러한 자연과의 결별은 인간과세계(자연 혹은 실재) 사이의 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징조이다. 오늘날의 세계화를 뿌리부터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변화의 본질과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의 전환: ‘동굴(the Cave)’에서 암실(the Dark Room)’

 

이러한 변화는 두 개의 근본적인 이미지를 비교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플라톤의 국가론7권에 나오는 동굴의 이미지이다. 둘째는 로크의 인간오성론에 나오는 암실의 이미지이다.

처음 보기에 두 이미지는 매우 비슷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둘 다 빛의 비유를 사용한다. 그리고 둘 다 인간은 처음에는 암흑의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 상태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로크의 암실은 플라톤의 동굴의 변형 내지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로크의 암실은 플라톤의 동굴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이 우리의 고찰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두 이미지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간과하도록 이끌어서는 안된다.

동굴은 열린 공간이다. 동굴의 구석 끝에 앉아 있는 죄인은 벽에 반사된 그림자를 보도록 강요된다. 그는 그것만이 실재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를 돌아서게 할 때 (그것이 플라톤의 교육인 파이데이아이다), 그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향해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빛을 향한 움직임은 불을 먼저 보고, 동굴 밖의 그림자들을 보고, 마침내 태양을 보는 것과 같은 다양한 단계들로 구성되는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빛으로 상징되는) 존재 혹은 실재는 자신을 다양한 수준으로 드러낸다. , 먼저무에 가까운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 시작하여, 다음에 그 존재의 강렬함을 증진시키는 단계를 거쳐서, 마침내 모든 존재와 지식의 첫째 원인이 되는 선(태양)의 이데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며, 플라톤에게 있어서 실재 (존재)는 깊이를 가진다. 플라톤의 교육은 빛의 증가되는 강렬함으로 상징되는 실재의 깊이 속으로 인간의 영혼을 몰입시키고 변혁시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몰입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 본질적으로 실재의 궁극적 원천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이것은태양의 빛이 인간의 눈에 내재한다는 구절에 암시되고 있다.

다른 한편, 로크의 암실은 닫힌 공간이다. 이러한 비유는 인간의 마음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암실은 외적 감각과 내적 감각이라는 두 개의 창문을 가진다. 이러한 창문을 통해서 밖에 있는 사물의 외부적이고 가시적인 모사와 관념들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우리는 로크가 “idea”라는 말을 플라톤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idea(eidos)는 사물의 원형, 인간의 마음 외부에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이다. 이와 반대로 로크에 있어서 이것은 밖에 있는 사물의 모사로서 인간의 마음에 비춰진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정신적 이미지일 뿐이다. 플라톤의 철인이 동굴을 탈출하여 위에 있는 실재로 초월하여 갈 수 있는 반면에, 로크의 인간은 그의 마음의 벽 안에 갇혀 있어서 실재와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의 요점은 그가 암실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암실은 인간이 결코 탈출할 수 없는 마음의 감

옥과 같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감각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물의 모사와 관념들을 고찰하는 것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탈출 가능성이 없는, 플라톤의 동굴의 죄수와 같다. 분명히, 플라톤은 이런 상태를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이런 상태를 불만스러워 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인간 인식의 새 장을 여는 것은 (처음에는 그것이 패러독스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러한 지적 금욕주의와 자기 한계인 것이다. 자신을 넘어서 실재의 깊이 속으로 자신을 몰입시키도록 맡기는 것은 마음 안에 있는 관념을 주의 깊게 조사하고 검사하는 일을 동반한다. 이처럼 외부의 실재를 직접 아는 것을 포기하고 그것의 모사 (관념들 혹은 다른 용어로 표상들)에 만족했을 때에만 비로소 (신적인 것이 아닌) 인간적 지식의 확고한 기초가 확립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반성적 전환을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의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현대 과학의 결정적 특징으로서의 인식론

 

이것은 유명한 데카르트의 회의론을 연상시킨다. 사실 로크의 암실은 그의 유명한 프랑스 전임자의 인식론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정신은 로크의 암실에 합리적으로 비교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예시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철학과 과학에서 과거에 권위를 가졌던 것들에 의존하기를 확고히 거부한다. 그 결과 그는 자신만이 남는다. 그리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발견되는 관념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의 유명한 방법론은 이러한 내적 데이터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네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 1) 명석, 2) 분석, 3) 종합, 4) 탈락 없는 목록, 유클리드 기하학처럼 과학은 복합적 실체를 단순 명료한 요소들로 분석해야 하며, 이 요소들로부터 탈락 없이 전체를 재구성해야 한다.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의 현대적 전환을 이러한 방법의 우위성보다 더 분명히 상징하는 것은 없다. 고대 철학에서 과학의 가치는 그것이 관심을 가진 존재의 등급에 의해, 현대적 표현을 사용하자면 대상의 위대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정치학이나 실천적 지혜(phronesis)는 최고의 덕으로 간주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충분히 정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이 우주에서 최고의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반대로 데카르트 이후의 시대에서는 인식대상의 지위가 아니라 방법의 정확성이 과학의 가치를 결정한다. 대상이 아무리 작고 시시해도 그것이 확실한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면 그것에 대한 탐구는 과학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플라톤의 철인은 마음의 눈을 존재의 빛에 적응시키는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자아의 변혁을 포함했다. 데카르트와 로크의 학자들은 내적 데이터를 방법론적으로 처리하는 데 몰두한다. 이것은 물론 교육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인식론, 테크놀로지, 세계화

 

이것을 고찰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인식론과 세계화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현대의 세계화는 자연으로부터의 결별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현대 테크놀로지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때 우리는 인식론을 현대 테크놀로지의 배경으로 고찰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한 것은 현대 테크놀로지와 인식론이 쌍둥이 자매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인식론은 자연을 조사되고 확증될 수 있는 내적 데이터로 환원한다. 현대 테크놀로지 역시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대신, 계산하고 셀 수 있는 자연에 관한 데이터를 조사하고 조작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자신을 제한한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의 인지와 독립된 원래의 실체가 아니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이 따르거나 모방해야 하는 모델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조사되고 조작되어야만 하는,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처리되어야만 하는, 데이터의 체계로 제시된다:자연은 정보에 불과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정보 테크놀로지와 세계화의 역사적 위치를 이해할 수 있다. 오직 자연(혹은 실재)이 그것의 독립적인 실체와 위엄을 잃고 정신적 데이터 혹은 정보가 되었을 때 정보 테크놀로지가 태어날 수 있는 기초가 준비된 것이었다. 현대 테크놀로지 특히 정보 테크놀로지에 의해 가능하게 된 오늘날의 세계화는 현대의 인식론과 테크놀로지의 터전에서 자라난 산물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화는 단지 산물 그 이상의 것이다. 인식론과 테크놀로지의 진보는 지역적 문화와 종교에 제한되지 않으려는 결단과 보편적인(, 세계적인) 과학을 확립하려는 갈망에 의해 동기부여가 된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식론, 테크놀로지, 그리고 세계화라는 세 축을 가지게 된다. 그것의 영향은 원래는 서구에 제한되었으나, 지금은 모든 세계를 완전히 삼켜버린 것 같다.

 

교육에 대한 세 축의 영향

 

이 세 축은 현대 교육에 엄청난 영향을 가졌다. 방법에 대한 데카르트의 선호와 유사한 생각을 우리는 페스탈로치의 방법론(die Methode)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상 페스탈로치의 방법론은 데카르트의 네 가지 규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인식론과 마찬가지로 현대 교육 역시 내적 관념과 표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페스탈로치와 헤르바르트의 교육적 방법은 대부분 표상들을 질서 지우고, 정리하고, 조작함으로써 학생들의 흥미를 증진시켜 교수를 보다 효율적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현대 교육의 교육과정은 대부분 이러한 인식론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은 플라톤의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는 플라톤 아카데미의 교육과정과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두 교육과정의 차이는 수학이 수행하는 역할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두 교육과정에서 모두 수학이 중요한 교과이지만,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완전히 다르다. 플라톤의 교육과정에서 수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 즉 그것이 영원한 이데아에 가깝기 때문이다. 현대 인식론과 교육에서 수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완전이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교육의 특별한 특징은 일본의 유교 교육(중국이나 한국에서도 대체로 유사한 현상을 찾을 수 있다)과 비교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에도 시대의 일본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각 단어의 의미도 배우지 않은 채 유교 사서의 구절들을 암송하고 외는 것이 요구되었다. 단어의 설명은 둘째 단계가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래서 유교교육은 전체 교과서를 배우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에 각 부분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로 나아갔다. 현대 교육에 있어서 이러한 종류의 교육보다 더 낯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꽤 효과적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적어도 그것은 고전 중국어를 읽고 쓰는 데 능통한 학자들을 길러내었다.

플라톤과 유교를 비교한 것은 현대의 교육이 그렇게 보이는 만큼 보편적인 것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현대 서구의 지평, 우리가 인식론, 테크놀로지, 그리고 세계화라는 세 축을 통해 설명하려 했던 지평으로부터 생겨난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다.

 

현대 교육의 꿈의 충족으로서의 정보 테크놀로지

 

지난 두 세기 동안 현대의 교육은 그 자체가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교육은 세계의 많은 지역에 도입되었고, 이것은 서구 과학 및 테크놀로지 도입의 한 부분이 되었다(소위서구화).

최근의 세기에서 이러한 과정은 정보 테크놀로지의 진보에 따라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 테크놀로지가 교육에 의해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전체 문제가 이러한 측면에만 제한된다면, 우리가 합리적으로 해야 할 모든 것은 교육을 위한 정보 테크놀로지의 정확한 사용을 평가하는 일일 것이다. 그 경우 교육과 정보 테크놀로지 사이의 관계는, 고전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 축에 관한 논의를 통해 우리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처럼, 현대 교육은 처음부터 세계에 관한 표상(정보)을 조사하고 조작하는 것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교육은 표상(정보)을 정리하는 기술(Kunst)이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정보 테크놀로지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근의 정보 테크놀로지의 진보는 현대 교육의 꿈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보 테크놀로지는 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교실에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최상의 효율성을 가지고 이러한 데이터를 정리하고 조작할 수 있는도구를 제공해준다. 이 덕분에 오늘날 교실의 학생들은 마우스 클릭 한번으로 멀리 떨어진 곳의 식물들, 동물들, 도시들, 예술품들 등의 정확한 사진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현대 교육의 진보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교육의 진보가 반드시 교육의 진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실지로 정보테크놀로지의 도래 이후, 현대 교육의 제한성은 전보다 더 분명히 드러나게 된 것 같다.

 

정보 테크놀로지와 마음의 감옥

 

현대 교육의 제한성은 교육의 목표의 빈곤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이것은 현대 교육이 교육의 목표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현대 교육은 분명히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현대 교육은 교육 목표를 그 자체의 기반 위에서 제시할 수 없었으며, 고전적 존재론으로부터 하나님(코메니우스), 자연(루소, 페스탈로치), 그리고 실재(헤르바르트) 등과 같은 개념을 빌어 와야만 했다. 따라서 현대 교육은 야누스의 얼굴, 즉 두 가지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된다. 그 방법 면에서는 (로크의 암실을 통해 설명되었던) 현대 인식론에 기초한다. 그러나 교육 목표 면에서는 (플라톤의 동굴을 통해 설명되었던) 고전적 존재론에 의존하는데, 이것은 현대 인식론이 거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현대 인식론은 교육의 목표를 논의하는 데 별 소득이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 같다. 고전적 교육 이론들은, 그것이 플라톤의 파이데이아이든지, 기독교 교육이든지, 혹은 유교의 학습이든지 간에, 교육의 목표를 제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인간은 보다 넓은 맥락 안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거꾸로 인간이 세계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선의 이데아, 하나님 혹은 천국 등과 같은 보다 높은 존재와의 관련 속에서 그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받았다. Chung Yung에서의 구절은 이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늘이 인간에게 준 것은 자연이라 불린다. 자연을 따르는 것은 길이라 불린다. 길을 경작하는 것은 교수라 불린다.”

다른 한편, 현대 인식론에서 인간은 자신 홀로 남겨진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하였듯이, 현대인은 그 자신의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는 표상들을 세밀히 분석할지 모르지만, 그는 결코 암실에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 그는 결코 자신을 넘어설 수 없으며, 자신을 초월하거나 변혁할 수 없다. 자신과 홀로 남겨져서, 현대인은 보다 넓은 맥락 안에서 방향 감각을 가지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이것은 현대인의 곤경이다. 교육의 목표에 대한 논의의 빈곤은 이러한 곤경의 징후이다.

정보 테크놀로지는, 표상들을 조작하는 능력을 증진시킴으로써 마침내 초월적으로 있는 것들과의 연결을 끊어버린다는 점에서, 교육에 대한 도전이다. 정보 테크놀로지는 인간에게 이전 시대에는 끔도 꾸지 못했던, 믿을 수 없는 정도로 많은 양의 다양한 표상들을 가져다 주었다. 뉴욕, 도쿄, 혹은 서울에서 사는 학생은 쉽게 소크라테스나 공자가 꿈꿀 수도 없었던 정보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동시에 정보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정보 안에 가두며, 그에게서 실재에 대한 감각을 위협하여 빼앗는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현대의 인식론에 잠재된 위험이었다. 실재에 어떤 기초도 가지지 않은 표상들을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 악한 천재에 대해 데카르트가 가졌던 불안은 이것을 증언해준다.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 플라톤과 기독교의 존재론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전적 존재론과의 연계는 정보 테크놀로지의 도래로 인하여 마침내 깨어지게 되었다. 정보 테크놀로지는 17세기 이래 숨어 있던 문제를 완전히 드러내었다.

 

고전적 경작(cultivation)와 변형(metamorphosis)

 

이제 우리 연구의 마지막 요점에 접근할 때이다. 세계화 시대에 교양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식론-테크놀로지-세계화의 세 축에 의해 야기된 급격한 변화는 분명히 문화인 혹은 교양인(a cultivated person)의 지위에 영향을 미친다. 단어 자체가 보여주듯이, ‘배양(culture)’이나 경작(cultivation)’이라는 말은 농업에서 강하게 유추된 것이다. 식물의 삶과 같이, 인간의 삶도 자연 혹은 땅에 의해 양육되며 점차 빛이나 천국에 의해 상징되는 보다 놓은 단계를 향해 자신을 변형시키는 bildes성장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성장이 자기 변혁 혹은 변형이다.

배양이나 경작의 개념은, 식물의 비유를 표면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고전철학에서는 매우 보편적이었다. 동굴의 비유에서 나타난 플라톤의 파이데이아는 죄수의 점진적인 변형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죄수는 동굴의 어두운 구석에서 데이터를 조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동굴에서 나와, 그가 올라감에 따라 빛의 강도를 증진시키는 빛에 그의 눈을 적응시킨다.

인간 성장을 변형으로 보는 또 하나의 좋은 증언은 공자가 논어에서 자신의 늙어감에 대해 스스로 한 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확립하였으며, 마흔 살에 의심과 유혹에서 자유로웠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현대 학자와 전문화

 

인식론이 발흥함에 따라 학문의 지위는 급격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배양의 개념이 기초했던 존재론은 인식론에 의해 대치되었다. 로크의 암실에서의 학자의 사명은 자기 변혁의 여정을 위해 암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학자나 과학자는 표상이나 데이터를 가지고 시작하며, 그것으로 끝내야 한다.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어느 표상이 보다 높은 가치를 가지는가의 문제는 부적절하다. 과학의 가치는 그 대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적 정확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다음 단계로, 표상의 분야가 전문화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도록 충분히 제한적일 것을 요청한다. 현시대에서 전문화는 과학의 진보에 의해 생겨난 필요악이 아니다. 오히려 전문화는 (그것의 쌍둥이 자매인 공동연구와 함께) 과학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조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현대 학자를 거머리의 뇌에 관해 탐구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상기하는 것은 흥미롭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러한 학자를 비웃기는커녕, 그를 보다 좋은 사람으로 간주한다. 실지로, 니체와 보다 유명한 막스 웨버에 의해 묘사되는 현대 학자들의 엄격히 절제된 태도는 존경을 받는다.

 

전통적인 배양(문화) 개념의 재평가와 다문화주의의 과제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전문화가 현대 인식론의 산물이며 스스로 끈질기게 전문화에 종사하는 것은 로크의 암실의 벽 안에 자신을 가두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전통적인 배양과 교육의 개념을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식물의 비유와 관련하여 소개한 천국과 땅의 개념이 여기서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천국은 인간의 책략을 넘어서는 초월성의 방향을 상징한다. 과거의 위대한 종교와 철학들은 대부분 이러한 측면에 관심을 가진다. 땅은 어두운 땅, 기원, 뿌리를 상징한다. 언어와 전통, 요컨대 인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주로 이러한 측면에 관심을 가진다.

다문화적 연구들은 여기서 환영받을 것이지만, 그것은 다른 문화들에 대한 표상들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만일 다문화주의가 유행하는 과학 이상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표상들을 초월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문화들의 지평들, 그것들의 천국과 땅을, 객관적으로 연구될 수 있는 정보와 데이터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인간 성장과 변혁이 합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서 이해하도록 우리를 개방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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