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방송을 통해 본 심샘

공중부양의 인문학 사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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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은 반드시 통합하는 여러 대상을 전제로 합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거의 모든 학교가 남학교와 여학교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어울려 공부하는 학교는 ‘남녀 공학’ 학교라고 해서, 아이들이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랬던 학교의 모습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남녀 공학으로 바뀌었고, 거의 모든 학교가 남녀 공학 학교로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굳이 ‘남녀 공학’이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죠. 그리고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해서 이를 ‘남녀 통합교육’이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냥 ‘가나 중학교’, ‘다라 고등학교’라고 부르고, 그곳에서 모든 학생의 교육활동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교육의 형태는 사회·문화·역사적 배경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각 구성원의 필요와 요구로 성립됩니다. 굳이 장애를 많이 느끼는 학생을 위한 우리의 교육이 사회·문화·역사적 배경이 다른 나라들과 같은 모습일 필요는 없습니다. 반드시 분리교육 또는 통합교육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한 번쯤은 벗어던져야 합니다. 망가진 그림은 덧칠할수록 더 해괴하게 변할 뿐입니다. 장애를 많이 느끼는 학생의 ‘적절한 교육지원’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작정 따라 하기’라는 망가진 현재 통합교육의 그림을 버리고 다시 그리는 것입니다. 통합교육이냐, 분리교육이냐를 떠나서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교육 형태가 무엇인지 철학적 고민과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논의 위에 모든 ‘사람 학생’을 위한 적절한 교육의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합니다.
  모든 학생에게 적절한 교육이라는 그림을 다시 그리기 위해서 저는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먼저, ‘장애’와 ‘장애인’에 관한 관점을 세우는 일입니다.
  장애란 무엇일까요? 정말 대단히 크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일단, ‘어떤 일의 성립, 진행에 거치적거려 방해하거나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게 함.’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져와 간단히 설명하면 장애란 ‘어떤 활동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사전적으로 보면, 무릎이 아프거나, 다리가 없거나, 몸이 몹시 피곤한 상태등의 사람이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려는데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계단은 장애입니다. 학원에 다니고 싶은데 돈이 없다면, 돈이 학습활동을 가로막는장애지요. 또는 수 억대의 스포츠카를 사고 싶지만 내 손에 없는 돈도 장애일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앞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셀 수 없는 장애가 있는 셈이죠.
  그럼 장애인은 뭘까요? 장애인은 ‘사람다움에 이르는 과정이 가로막힌 사람’일까요? 아니면 ‘누군가의 어떤 활동을 가로막는 사람’일까요?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장애인이라고 하면,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어 삶에 제약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장애인은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장애를 가졌다(또는 장애가 있다).’라는 관점의 장애인관은 사람 자체를 장애로 보는 오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 땅속에서 흙을 뚫고 올라올 때, 앞을 가로막고 짓누르는 바위는 새싹의 활동(자람)에 장애입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자람(활동)이 가로막힌 씨앗을 ‘장애 씨앗’이라 부르지 않지요. 오히려 씨앗의 자람을 가로막는 바위를 장애라고 합니다.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관계, 몸, 구조 등 사람(개인)의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다양한 장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장애에 가로막힌 사람 자체가 장애일 수는 없습니다. 자람이 가로막힌 씨앗에 ‘장애 씨앗’ 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처럼 행복한 삶이 가로막힌 사람을 ‘장애 인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삶에 장애가 있을 수 있지만, 장애 인간(장애인)은 없습니다. 장애라는 말의 의미를 충실하게 확장해서 굳이 장애인에 관한 정의한다면, ‘사람의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꼰대 상사, 집단 따돌림으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 사람을 죽이는 사람, 사람을 사람 아니게끔 만드는 사람, 또는 내 부모를 죽인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정도입니다.사람을 사람으로 살 수 없게 하는 모든 사람이 장애인인거죠. 그리고 현재 '장애인'으로 명명된 사람은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를 (남보다 많이) 느끼는 사람"일 뿐입니다.
  모든 교육 대상자에게 적절한 교육은 이렇게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바른 관점이 세워졌을 때 비로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모두에게 적절한 교육이 되기 위한 두 번째 논의 거리는 특수교사 제도의 폐지입니다. 특수교사 제도를 폐지한다고 하면 특수교육 관련 일을 하거나 장애를 많이 느끼는 사람이나 가족들은 많이 의아해 합니다.(미쳤나봐 라고...) 하지만 제 생각엔 "특수"를 버려야 아이들이 삽니다. 진정한 통합교육은 '통합'이란 말이 존재하지 않는 교육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교사 체계는 크게 일반교사와 특수교사로 나눕니다. 장애를 많이 느끼는 학생을 위한 특수교육은 특수교사 자격을 받은 선생님들에 의해 특수학교나 일반 학교의 특수학급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소위 일반 교육은 일반교사 자격을 가진 선생님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 중 일반학교의 통합학급(일반학급)에서 일반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장애를 많이 느끼는 학생 통합교육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친절하게 격리된 섬에 가깝습니다. 장애를 많이 느끼는 학생의 적절한 교육을 위해 설치·운영하는 통합학급이 섬으로 변하는 것은 학교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교사들이 사람을(정확히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여러 장애'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DSM-5에서는 사람의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다양한 요소를 장애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폭식, 생리 전 불쾌감, 수집광, 불면 등 예전에는 일상을 방해하는 현상이거나 괴팍해 보이던 행동이 이제는 장애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장애는 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시기, 상황, 구조 등에 따라 사람의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다양한 것으로 광범위하게 확장·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다양한 요소를 장애로 인식하기에 누구나 장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누구나 장애를 느끼는 학생을 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애학생의 교육은 특수교사’, ‘비장애 학생의 교육은 일반교사’라는 등식은 이제 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면 그는 곧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는) 특수교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장애를 느끼며, 장애를 느끼는 타자와 함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특수교사 제도를 폐기하고 모든 교사가 ‘장애학’을 특정 학점 이상 이수하도록 교사양성 과정을 개편해야 합니다.(전 개인적으로 12~18학점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부터 통합되어야 장애를 많이 느끼는 학생에 관한 적절한 교육지원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특수교육과를 사범대의 일반교육과로 전환하여 특수교육과를 폐지하고, 교육대와 사범대의 교직과정에 장애학을 신설해야 합니다(현재 교대와 사대에서 특수교육학 개론을 필수로 듣는 경우가 많은데, 특수교육학 개론과 장애학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그런 다음에 특수학교와 일반학교 통합학급의 존폐 문제, ‘하나의 교육’ 속에 들어온 ‘장애를 많이 느끼는 학생’에 대한 적절한 교육 지원과 교사배치 등은 깊은 논의를 통해 해결방법을 도출해 내야 합니다.

 

  장애를 많이 느끼는 학생의 적절한 교육을 위해 고민해야 할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함께 있으므로 행복한 사람의 삶’을 위한 사회·문화적 환경 만들기입니다.
  우리 사회는 무한 경쟁 사회입니다. 20~3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우리는 유아부터 노인까지 삶의 거의 모든 장면이 경쟁입니다. 유아기 때부터 이웃집 아기와 ‘기기’, ‘걷기’ 등을 비교당하면서 우리 시대의 경쟁이 시작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지경이지요. 어쨌든, 그 모든 경쟁은 양적인 수치로 평가되고, 이로 인해 개인의 경제적 삶의 수준이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물론, 재벌이나 정치인 등 대다수 권력자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삶을 나누는 공동체가 아닌 경쟁의 정글로 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보다 (특히, 암기와 시험 등 인지능력에서)더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사람들을 무한 경쟁에 뛰어들게 합니다.
  어릴 적엔 나의 결정이 아닌 타자와 환경 등 타의에 의해 무한 경쟁의 트랙에 서게 되고, 자라면서 다양한 장에서 조금씩 더 심화하는 경쟁을 겪습니다. 이렇게 심화하는 경쟁과 함께 사춘기를 넘기면서 삶의 모든 장에서 스스로 경쟁하고자 하는 욕구가 발생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보편적이고 평범한 사람에게 얼마나 어이없고 불공평한 곳인지 자신의 다양한 (인지능력만의) 경쟁 경험을 통해 목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스펙과 적당한 허세를 군장처럼 차고 특혜와 특권을 누리는 그들처럼 되고자 결국 ‘스스로’ 무한 경쟁의 트랙에 서게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으로 디자인된 사회입니다.
  이렇게 경쟁을 통한 부와 권력의 쟁취만이 유일한 행복의 조건으로 구조화된 사회에서 ‘함께 있으므로 행복한 삶’을 이야기하는 자체가 위선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경쟁의 삶을 바꾸지 않는 한, ‘함께 있음으로 행복한 삶’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장애 유무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경쟁으로 디자인된 사회를 극복하고 ‘함께 있음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 시작은 경쟁의 분류와 그에 관한 자각입니다
  경쟁의 사전적 의미는 ‘같은 목적에 대하여 서로 이기거나 앞서려고 다툼’입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노동할 권리를 주장했던 루이블랑Louis Blanc은 「노동의 조직(1840)」에서 ‘경쟁은 모든 전쟁처럼 승자의 전차에 노예를 매단다.’고 하고, ‘경쟁은 악(惡)’이라고도 하며 신랄한 비판을 가합니다. 그러면서 정부의 과제는 경쟁과 싸우는 것이라고도 하지요. 당시는 프랑스 혁명과 증기기관의 발명 등으로 근대산업이 급격히 발달하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그동안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돌아가던 공장들에 방적 기계 등이 도입되어 기계화되면서 상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숙련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그 자리는 어린 비숙련 노동자들로 매워지게 됩니다. 숙련 노동자가 아니기에 임금은 대폭 하락하게 되죠. 반면, 먹고 사는데 필요한 식료품 등의 물가는 상승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영국 정부의 단결금지법 때문에 계속되는 임금 하락에도 대처할 수 없던 노동자 계급은 극심한 굶주림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면서까지 극렬하게 저항합니다. 이렇게 극심한 굶주림과 가난을 지나면서 루이블랑은 노동할 권리를 주장하게 되고 노동자의 삶이 경쟁체제로 몰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경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루이블랑의 의견처럼 노동자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삶이 경쟁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함께 있으므로 행복한 삶이 실현되는 사회가 되려면 경쟁해야 할 부분이 있고, 경쟁하지 않아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물론 그 중간도 존재하지요. 경쟁해야 할 장부터 협력해야 할 장까지 우리 삶의 영역은 다양합니다.
  우리 사회를 크게 생존(기본적인 의식주와 환경), 교육, 체육, 예술, 정치, 경제, 국방 등의 영역으로 구분한다면, 이들 영역의 협력과 경쟁 정도는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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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과 관련된 기초적인 의·식·주와 환경문제 등은 반드시 협력해야 좀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어야 사회는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기본적인 생존 영역은 협력할수록 좀 더 나은 경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존과 관련된 정보와 재화는 합리적인 원칙과 과정에 의해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생존의 영역인 주택은 협력의 대상이지 경쟁을 통한 이익 창출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 사회의 구성원이 합의하는 일정 가격(노동자 평균 연봉의 15배) 이상의 주택거래 차익의 100%를 세금으로 환수함으로써 사람의 주거환경을 이용해 돈벌이 경쟁을 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교육도 상당한 부분은 협력의 영역에 속합니다. 교육이 존재할 수 있는 기본배경은 소통입니다. 소통은 타자와의 협력을 더욱더 강고(强固)하게 만들고, 협력은 더 원활한 소통을 위한 기반이 됩니다. 소통과 협력은 서로 확대·순환의 관계입니다. 확대·순환되는 소통과 협력을 통해 좀 더 많은 이의 행복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교육은 이러한 협력과 소통을 촉진하는 촉진자입니다. 교육의 대부분은(‘모든’이 아닙니다.) 반드시 협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면, 경제와 정치 영역의 여러 부분은 무한히 경쟁해야 합니다. 경제는 재화를 생산·유통·판매함으로써 사람의 삶을 좀 더 풍부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영역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는 이윤의 극대화를 최대 목적으로 하므로 이윤을 위해서라면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위험도 있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생산·유통·판매 전(全) 과정의 투명성, 윤리 경영, 환경 경영(사람과 자연에 도움이 되는 경영) 등에서 무한히 경쟁해야 합니다. 아무리 크고 힘센 기업이라도 그 경쟁에서 도태되면 사라지도록 강력한 규칙에 기반을 둔 경쟁이 필요합니다. 기업 활동의 투명성, 경쟁의 윤리성, 친환경성 등은 지구와 인류의 생존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 영역의 국회의원 등 정치인, 판사·검사·변호사 등 권력자들에게는 무제한 경쟁이 더욱더 필요합니다. 정치는 정치 활동의 결과물이 우리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유형의 영역이지만, 그 과정 자체를 투명하게 볼 수는 없는 무형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의 정치적 결정이 시민 삶의 양식과 의지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지 전쟁인 선거 이외에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로 매일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 이것은 경쟁이 아닙니다. 그들의 싸움은 다음 선거에서 이미지 구축을 위한 서로의 협력일 뿐입니다. 정치 자금의 투명성에 관한 경쟁, 청렴에 관한 무한 경쟁과 공소시효 없는 무한의 책임, 불합리한 법률의 개정·폐기와 필요한 법률의 제정에 관한 무한 경쟁, 시민을 위한 면책 특권 사용에 관한 경쟁 등 정치행위에 관한 모든 것에 무제한 경쟁을 강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절대 스스로 경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으므로 행복한 삶으로 우리 사회를 재디자인하기 위해서는 경제와 정치 영역의 몇 부분뿐만 아니라 방송과 언론, 검찰과 경찰, 판사, 고위 공무원 등 몇몇 부분에서도 무한 경쟁이 필요합니다.
  경쟁해야 할 영역과 경쟁하지 않아야 할 영역을 구분하고, 장(場)에 따라 경쟁과 협력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만드는 것은 장애를 많이 느끼는 학생만을 위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사는 모든 이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꼭 깨어 행동해야 합니다.
  많이 돌고 돌아왔는데요. 지금처럼 같은 공간만 나눠 쓰며 장애인 통합교육이라 부르는 것은 참 민망하고 처량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사람 각자의 처지를 고려한 적절한 교육, 좀 더 사람의 얼굴을 한, 모두를 위한 하나의 교육은 특수교사 제도를 폐지하여 모든 교사가 사람의 발달을 이해하고 (장애)학생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함께 있으므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이 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사회·문화적 환경을 조성하려 늘 깨어 행동할 때 모두에게 적절한 교육, 진정한 통합교육은 실현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글은 심승현의 "공중부양의 인문학(쿠움)"에서 가져 온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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