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담(談)

그동안 도대체..

posted Nov 01, 2023 Views 10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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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주변 정리 좀 하고 올라온다면서 목포로 다시 내려갔다.

신장농양으로 2주간의 입원을 끝내고, 통원 치료를 위해 2주의 병가를 더 내어 집에 있다. 한 달의 병가는 삶에 대한 나의 믿음과 현실을 하나하나 비교하며 떠올리게 한다. 내가 바라는 '당위의 세상', 그 세상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도대체 누구를 희생시키며 살았는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56년 만에 한 달의 병가를 받아 들고서야 비로소 객관적으로, 공중부양하듯 삶을 뒤돌아볼 수 있었다.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산 거지?'

 

지난 30년간 발달장애 학생들이 어떻게 자라야 건강하게 될지, 어떤 배움이 이 아이들 삶에 도움이 될지, 이 아이들의 삶이 행복하기 위해 내가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거의 쉬지 않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나눔으로 평화로운 세상. 나눔과 평화의 교육. 긴장과 조절로 조화로운 정신의 인간...' 이런 교육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수업방식을 도입했고, 성과도 좋았다. 학령기 동안 나와 함께 생활한 발달장애 아이들이라면 정말 좋은 경험을 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다양한 형태의 교실 수업뿐만 아니다. 경험의 폭이 좁은 아이들의 경험치를 높이기 위해 방학 때면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한 계절학교를 열고, 주말(예전 놀토)이면 토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안 가 본 데가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건 모두 남의 자식을 위한 것이었다. 정작 사랑하는 두 아들의 학령기에 나는 없었다. 두 아들은 묵정밭에 자라는 개망초와 같았다. 그리고 난 그저 행인처럼 보고만 있었다. 거름 주고 물 주며 가꿔야 할 나의 꽃인데도.

 

통원 치료를 위해 집에서 쉬고 있는데, 목포에서 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들이 올라왔다.

공교육의 틀 안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못 받고 자란 아이. 제대로 된 진로교육을 못 받은 아이. 공교육의 틀 안에 있으면 식물처럼 잘 자랄 거란 믿음에 공교육에 온전히 맡겨졌던 아이. 그저 뜬구름 잡는 아버지의 이야기만 듣고 자란 아이.... 이제는 정신적 어려움에 부닥친 나의 아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공교육만으로 충분한 교육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보편적인 공교육을 통해 자란 건강한 평민이 많아야 좋은 사회가 된다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두 아들의 학령기 교육 이력은 학교 교육이 거의 전부다. 쉽게 말하면 두 아들에게 교육은 공교육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데 미몽에서 깨어 생각해 보니 공교육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부모의 간섭과 개입이 없이 그냥 공교육에만 맡긴다는 건 아이를 방치하는 것과 같다. 이상이나 지향에 상관없이 이게 현실이다. 소위 교육 운동한다는 다른 이들도 자기 자식의 좀 더 나은 교육을 위해 학원 등을 찾고, 공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면 대안학교 등을 찾아보는 등 열심인 것 같은데, 나만 그냥 환상 속에 살았다. 믿음과 현실의 큰 괴리를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면서 30년을 살았다.

두 아들 학령기 때

"당신은 우리 아이들에게 반의반만이라도 해봐. 우리 애들 데리고 어디 놀러라도 가 봤어?"

라며 불평하는 아내의 말에 오히려 화를 내던 모습이 생각난다. 가능하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 꾸짖어 주고 싶다. '너는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을 외면하고 있잖아!!' 라고.

"아이들 어릴 때, 아이들 학습지라도 하려고 치면 당신이 얼마나 눈치를 줬는데.."

라는 아내의 말이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위의 세상과 현실은 다른 것'이니 정신 차리라고 내 얼굴에 퍼런 발자국을 남겨 주고 싶다. 제발 좀 약게 살라고.

 

스물여섯 먹은 둘째 아들을 배웅하며 역 앞에서 꼭 안아줬다.

무기력과 자존감 상실로 힘들어 휴학을 신청했단다. 2학기 수업은 이미 많은 결석으로 구멍이 숭숭했다. '집에 오면 부담감, 목포에선 몽롱함'이란다. 두문불출, 하루종일 누워만 있는 건 집이나 목포나 같다.

며칠간 함께 있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둘째의 무기력과 자존감 상실은 십수 년에 걸쳐 축적되어 온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학령기 때부터 쌓인 나의 안일함이 많은 원인이었다. 휴학한 김에 집에서 쉬면서 몸과 마음을 좀 추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데 기껏 생각나는 건 상담과 치료 정도다.

목포에 정리할 일이 남았다며 내려간다기에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일이 둘째에겐 중요한 일일 것 같아 망설임 끝에 잘 다녀오라 다독였다.

역에서 집까지 평소 10분 정도의 길을 한참 동안 걸어왔다.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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