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방송을 통해 본 심샘

공중부양의 인문학 사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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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학교를 제안하며 /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평화로운 교육과 평등한 사회참여를 위하여

지금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에게 내일은 있습니까?
12년의 학교생활을 끝내고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들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때, 그들의 앞을 막고 선 삶에 대한 막막함을 느끼지 않는 부모나 교사는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

양적으로 늘어나는 많은 특수학교를 보면서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을 ‘가르치는’ 또 하나의 특수교육기관으로 비춰질지도 모를 새로운 학교를 제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삶에 대한 정부 정책은 철학 없는 시혜에 머물고 있고, 대다수 특수교육 종사자들이 특수교육기관을 단지 ‘가르치는’ 곳으로 생각하며, 학령기의 많은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 부모들은 이들의 인지적 학습에 대한 좌절과 미래설계에 대한 절망으로 암울해지는 현 시점에서 새로운 학교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게다가, 12년의 학교생활이 끝난 뒤에도 7할 이상의 아이들이 졸업 후 지역사회 공동체에서 자신의 사회적 삶을 이어가지 못하고 시설이나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현재 사회문화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노력은 참으로 작아 보이기도 합니다. 새로 제안하는 학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던 간에 기존의 학교와 같이 단지 ‘가르치는 것’에 머문다면 그 의미들은 또 하나의 ‘절망이라는 화살’로 바뀌어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과 그 부모들의 가슴을 향해 돌아갈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망설임과 고민 끝에 결국 새로운 학교를 세우자고 제안하는 것은 공명의식에 사로잡힌 몇몇 사람들의 자아도취도 아니고, 이 길에 들어선 주체들의 막연한 낙관도 아닙니다. 계속해서 자라는 정신지체ㆍ정서장애 아이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하면서 장애를 이유로 이 아이들의 인권이 쉽게 잊혀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후에 인간으로서 사회적 삶을 보장받지 못한 채 생물적인 삶만 이어가야 하는 뼈아픈 현실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로부터 몇몇 경제적 시혜 이외엔 어떤 배려도 받지 못한 채 졸업 후 아이들의 단기시설을 기웃거리다가 결국은 시설 등으로 보내야 하는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 부모의 번민과 체념 섞인 삶을 봅니다. 아마,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과 함께하는 사람들 중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거나, 이들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런 현실의 문제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작은 힘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새로운 학교를 제안하는 것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결코 적지 않은 이들의 지혜와 힘을 모아, 우리 사회에서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삶이 더 이상 방치될 수 없음과 미약하나마 새로운 해결책이 있음을 제시하고자 하는 작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느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비단 저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비장애인, 교사, 학부모, 가족 등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들의 삶에 대하여 고민하고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문제의식이 식상하게 비춰질 수도 있으며,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이 가진 장애로 인해 비장애인이 가지는 측은지심惻隱之心 - 동정심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인데 왜 그리 호들갑이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의식을 바라보는 관점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감춰진 우리의 현실이 치부와 같이 드러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나 학교, 시설에서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삶을 향한 동정심은 이들이 전 생에 걸쳐 보장받아야 하는 인간다운 삶보다 그들로 인해 자신을 드러내기에 급급한 유용한 도구의 역할을 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당수의 교사들에게서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삶을 향한 동정심은 이들의 인권과 끊임없이 이어져야 할 사회적 삶보다 현 시기의 행동수정이나 인지적 학습 등에 대한 관심으로 발현되어 왔고, 많은 부모들 또한 사회나 학교, 시설, 교사의 이데올로기(장애인이 불쌍하지만 ‘장애발생과 장애의 극복은 장애인 스스로와 가족의 책임이다’는 장애의 책임전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개인적 극복과 체념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을 둘러싸고 있는 이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이들에게 평화로운 교육과 평등한 사회참여를 보장해야 하는 것은 이들과 사회구조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을 가진 모든 이에게 외면할 수 없는 과제일 것입니다.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들은 학교, 지역사회 등 일상적인 생활의 장에서 그들이 가진 장애로 야기되는 수많은 대화의 단절을 겪게 됩니다. 이들이 겪게 되는 대화의 단절은 이들이 누려야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기저로써 작용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특히, 이러한 기본적인 인권의 박탈을 경계하고 조정해야 할 학교현장에서조차 체벌이나 무시, 과잉보호 등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여러 상황에 노출되어 있지는 않은가 되돌아봅니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저 자신을 포함한 많은 특수교육 종사자들이 진정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인권을 생각하였던가. 진정 이들과 대화하려 노력하였는가. 진정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며 대해 왔던가. 저는 감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들의 장애로 야기되는 대화의 단절 또는 생각의 차이가 인권의 단절, 인격의 차이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나 묻고 싶습니다.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평화로운 교육은 이들이 가지는 대화의 단절을 극복하고 이들의 정신과 영혼을 함께 공유하는 삶 교육이며 이는 이들의 삶이 단순한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삶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일 것입니다.

장애인의 날 등 어떤 특정 날이면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는 ‘장애를 극복한 의지의 한국인’처럼 많은 사람들은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도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주입되는 “하면 된다”는 인생역전의 환상처럼, 장애인도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는 우리의 장애에 대한 전형적인 책임전가며 불평등의식의 주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인과 어린이가 함께 경쟁할 수 없는 것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경쟁할 수는 없습니다. 비장애인들은 이미 수 십(아니, 수백) Km를 앞서 출발을 하지만 장애인 특히,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은 아직 자신의 몸조차 추스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같은 출발선에 세워두고 경쟁을 유도하는 기계적인 평등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인간의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경제적 기회의 평등, 정치적 결정권의 평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쉬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인 자,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 등 사람의 주관적인 조건에 따라 평등의 개념이 다르듯이 장애를 가진 이와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의 평등 또한 획일적일 수 없습니다. 개인의 주관적인 조건을 고려한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평등한 사회참여는 이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사회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필요조건일 것입니다.

평등하다면 평화롭습니다. 어지러움은 개인이 가진 다양한 인성과 사람과 사람사이의 여러 관계, 그리고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가 불평등할 때 발생하며 평화는 이들 관계가 평등할 때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학교를 통하여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평화로운 교육과 평등한 사회참여의 기반을 마련하고자합니다. 새로운 학교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등 모든 구성원 자신이 가지는 내적 다양성의 조화, 사람과 사람이 가진 차이의 인정, 사람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맺음이 이루어지는 삶을 실천하는 교육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더불어,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배려 또한 인간의 평등성과 함께 고려될 것이며, 이를 통하여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과 자연간의 대화 단절, 인간과 인간간의 대화단절이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삶의 파괴를 가져오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학습되었건, 사람이 스스로 가지고 나왔던 현상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서로의 대화를 단절시키는 요즘  명상과 철학적 성찰, 생태학적 복원운동, 대안학교와 대안 삶 여러 형태의 운동들이 대화의 통로를 열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들조차도 같은 인간이면서도 엄청난 대화단절을 지닌 채 살아왔던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간극을 최소화하고자하는 노력은 너무나 미미해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아픔과 이들 삶의 문제의식을 느끼며 살아가듯 결코 적지 않은 이들이 저와 같은 아픔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압니다. 함께 한다는 믿음과 함께 함의 더 큰 지혜와 힘을 모아,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평화로운 교육과 평등한 사회참여의 기반을 만드는 시작점을 만들고자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가 지나간 곳이 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 영구만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10-1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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