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방송을 통해 본 심샘

공중부양의 인문학 사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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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난 2005년 2월 26일 '차름학교'설립을 위한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글입니다. 각주 등이 들어간 글은 첨부파일을 참고하세요.
** 늦었지만 당시 세미나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오셔서 지루한 이야기 들어 주신 여러 학부모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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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눔으로 평화로운 곳 차름


안녕하십니까?

몸과 영, 그리고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기에 여러분의 평안을 기원하며 이야기를 시작할까합니다.
이야기 처음을 여러분의 안녕함을 기원하며 시작하는 것은 몸의 평안함을 잃으면 영과 마음을 담기 어렵고, 영의 평안함을 잃으면 몸과 마음이 자리를 잡기 어렵고, 마음의 평안을 잃으면 몸과 영의 피폐해지기 때문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 시간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 장애를 가진 ‘사람’과 함께 배움을 나누고자 하는 학교,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너른 마당인 “나눔으로 평화로운 곳 차름”의 설립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들은 학교, 지역사회 등 일상적인 생활의 장에서 그들이 가진 장애로 인해 일상적인 생활에서 수많은 대화의 단절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겪게 되는 대화의 단절은 대화가 단절되는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삶 속에서 지속적인 무시와 과잉보호, 강압과 방종 등으로 이어져 이들이 누려야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인 평안할 권리마저 박탈하는 기저로써 작용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몸은 자라되 영과 마음은 자라지 않는 사람으로까지 여겨지고, 소위 일반인이라 불리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몸 큰 아이’의 대접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특수학교에서조차도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들을 몸과 영, 그리고 마음까지 고려한 배움의 나눔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행동수정이라는 이름아래 행해지는 학습들, 원칙 없는 체벌이나 무시, 지루하고 반복적인 인지적 학습과 과잉보호 등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여러 상황에 노출되어 있음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저 자신을 포함한 많은 특수교육 종사자들이 진정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인권을 생각하였던가. 진정 이들과 대화하려 노력하였는가. 진정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영과 마음의 존재를 인정하며 대해 왔던가. 한번쯤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히려 이들의 장애로 야기되는 대화의 단절 또는 생각의 차이가 인권의 단절, 인격의 차이로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나 묻고 싶습니다.

장애인의 날 등 어떤 특정 날이면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는 ‘장애를 극복한 의지의 한국인’처럼 많은 사람들은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도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주입되는 “하면 된다.”는 인생역전의 환상처럼, 장애인도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는 우리의 장애에 대한 전형적인 책임전가며 불평등의식의 주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경쟁할 수 없는 것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경쟁할 수는 없습니다. 비장애인들은 이미 수 십(아니, 수백) Km를 앞서 출발을 하지만 장애인 특히,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은 아직 자신의 몸조차 추스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같은 출발선에 세워두고 경쟁을 유도하는 기계적인 평등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인간의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경제적 기회의 평등, 정치적 결정권의 평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쉬 알 수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이와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의 평등 은 획일적일 수 없습니다. 개인의 주관적인 조건을 고려한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평등한 사회참여는 이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합니다.
평등하다면 평화롭습니다. 어지러움은 사람이 가진 몸과 영, 마음 각각이 가지는 서로 다른 성질들과의 관계, 몸과 영, 그리고 마음간의 관계, 사람과 사람사이의 여러 관계, 그리고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가 불평등할 때 발생하며 평화는 이들 관계가 평등할 때 이루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살 만 해 졌지만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고, 그 빈곤감이 격화되어 사회적인 대립을 만들어 내는 등 얽히고설킨 여러 현실 사회 속에서, 평등에 기반을 둔 평화로운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꿈같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더구나 눈에 보이는 신체적, 정신적 차이를 가지고 태어난 장애인의 경우는 일반적인 힘의 우위에 기초한 평화조차 누리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신지체·정서장애인의 평등하고 평화로운 삶이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누리는 평화의 정도야말로 그 사회가 야만 사회에 서 있는가, 문명사회에 서 있는가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이기 때문이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평화로워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고, 더욱이 이 사회가 ‘사람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운 교육은 이들의 몸과 영 그리고 마음의 ‘자람과 배움’이 가르치는 이들의 그것과 평안하게 교류하는 과정이며 결과입니다. 특히,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의 평화로운 교육은 이들이 가지는 다양한 단절을 극복하고 이들의 삶이 단순한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삶으로 이어나갈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육은 평화로워야 하며, 평화로운 교육은 다음 몇 가지를 내용으로 가집니다.
첫째, 사람이 가진 몸과 영, 마음 각각의 조화입니다.
한 개인이 가지는 몸과 영, 그리고 마음의 상태는 일생동안 아니, 단 하루 동안도 일정하지 않습니다. 각각은 다양한 상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가 가진 주된 상태가 그의 모습이 되어 나타납니다.
마음을 예로 들면, 해와 달, 남과 여, 앞과 뒤, 선(善)함과 악(惡)함, 아름다움과 추함, 동물적인 욕정과 인간적인 이성 등 세상의 일반적인 자연현상이 그렇듯이 사람의 마음 또한 여러 색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 색의 마음 중 주된 것이 주변들의 것들을 가지처럼 모아서 한 인간의 자아를 형성하고, 그 주된 마음이 가고자 하는 지향점에 따라 가치관이 형성될 것입니다.
도둑질 후 마음을 예로 더하겠습니다. 도둑질을 한 후 사람의 마음은 수치심에서부터 자랑스러움까지 다양한 스팩트럼이 생기게 됩니다. 이 다양한 마음의 스팩트럼 중 수치심을 중심으로 주변마음의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자랑스러움을 중심으로 주변마음의 조화를 이루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 마음이 서로 긴장하고 대화하여 평안하고 행복 행복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며 개별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개별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재물이 행복인 사람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 살아가고, 권력이 행복인 사람은 권력을 위해 살아가며, 출세가 행복인 사람은 출세를 위해 살아갑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며 복잡하게 얽혀 나타납니다. 자아의 다양성과 다양한 사회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말입니다. 행복은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해 다른 이의 행복을 빼앗는 것까지를 포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타 주체의 행복을 앗아 쌓아올린 행복이 결국은 많은 불행을 가져온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이 함께 평온한 상태며 나아가 인간을 이 땅위에 생존하게 하는 자연까지 평온한 상태일 것입니다.한 상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평화로운 교육의 처음이어야 합니다. 몸과 영, 그리고 마음 각각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공부로 훌륭한 것들 중의 하나가 명상일 것입니다.  
둘째는 몸과 영, 그리고 마음 평등한 관계맺음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몸과 영, 그리고 마음 중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약화시키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처음 여러분의 평온을 기원하면서 드렸던 말씀처럼 몸의 평안함을 잃으면 영과 마음을 담기 어렵고, 영의 평안함을 잃으면 몸과 마음이 자리를 잡기 어렵고, 마음의 평안을 잃으면 몸과 영의 피폐해지기 때문이며, 몸과 영, 그리고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사람과 사람 간의 올바른 관계맺음 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면서 가지는 조건과 자라면서 가지는 환경의 차이로 인하여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듯이 사람 사회 또한 다양한 자아와 가치관으로 거대한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 사회가 가지는 다양한 문화의 스펙트럼 중 주된 세력이 주변 세력들을 모아 큰 흐름을 만들고, 그 큰 흐름이 지향하는 것은 그 사회의 문화가 됩니다. 다양한 자아들이 서로의 차이를 차별화하지 않고 골고루 만족할 관계맺음을 이룰 수 있도록 대화하는 방법에 대한 모색하는 것이 평화로운 교육의 다른 면일 것입니다.
넷째는 사람과 자연 간의 올바른 관계맺음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연은 사람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정복하거나 다스려져야 할 존재로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핵발전소를 만들어 인간에게 유용하다고는 하지만 핵발전소 때문에 많은 생명들이 어려움에 처하고, 바다를 막아 농토로 만들어 인간에게 유용하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수 많은 생명들이 죽고, 사라집니다. 결국, 수많은 생물이 죽어가는 만큼 사람의 평화도 깨어지게 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 또한 자연이 만들어 내는 큰 스펙트럼의 한 색에 불과하다는 간단한 사실을 간과하고 자연과 대화하기를 거부한 결과일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대화하고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평화로움 교육의 또 다른 면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몸과 영, 마음 각각의 조화, 몸과 영, 그리고 마음 평등한 관계맺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맺음이라는 평화로운 교육의 내용이 정신지체·정서장애인에게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행위의 중심에 사람이 있으므로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꼭 짚어야 하는 것이 사람을 보는 관점이기에 사람에 대한 제 생각을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차름학교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의 기반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차름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차름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꼭 듣는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함으로써 차름학교의 모습을 한 번 그려보려 합니다.

“왜 새로운 학교이어야 하는데? 기존학교에서는 안 돼나?”

가장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그냥 불쑥 나오는 대답을 말씀드리면, 기존의 학교에서 사람의 몸과 영, 그리고 마음을 아우르는 교육, 사람과 사람, 나아가 사람과 자연이 함께 평등한 관계인 학교를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학교에서 새로운 교육을 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는 여기 오셔서 이 이야기를 들으시는 분들 중에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기존의 학교엔 아이들을 바라보는 일관된 입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부실하거나 아예 없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교장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학교는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그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다양하게 아이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한 해는 아이를 과잉보호하고, 그 다음해 학교장이 바뀌면 아이는 귀찮은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학교의 모습에서 아이들의 몸과 영과 마음이 가르치는 이들의 그것과 지속적으로 평안하게 교류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두 번째 지금의 학교는 아이들과 몸과 영, 그리고 마음을 평안하게 교류하는 일보다 행정적인 일, 보여지는 일, 관리자를 드러나게 하는 일 등 형식에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 붓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은 내용을 규정하고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듯 형식과 내용은 서로 중요한 관계임에도 현재 많은 학교의 모습은 형식이라는 독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형국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이들의 몸과 영, 그리고 마음이 평온하게 자라기란 어렵습니다.
세 번째 아이들이나 아이들의 전 생(生)을 고민하는 교사 모두 행복하지 못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뿌리가 없으니 행복한 나눔문화가 생겨나기 힘들고 형식이 더욱 강조되니 따듯한 조직문화가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교사와 학생, 교사와 관리자 등의 수직적인 관계들 속에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이들의 전 생을 고민하는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행복하지 못한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나눔과 평화를 생각하기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데?”

모든 교원이 공통된 인식과 일관된 체계로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려고 합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교사협의회의 운영, 연속 담임제 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차름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학교 대표자를 선출하고, 학생 개개인의 교육과 삶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등의 시스템으로 교사협의회를 운영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사람의 몸과 영, 그리고 마음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공유하고 학생들의 교육활동에 일관된 접근을 할 것입니다.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들의 몸과 영, 그리고 마음이 순리에 따라 잘 자라고 서로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하여 생각한 것이 연속담임제입니다. 연속담임제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사소한 생활지도부터 진로지도까지 아이에게 일관된 지도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아이들에게는 매해 새로운 교사에게 적응함으로써 발생하는 불안정한 정서를 해소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학교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간의 관계가 조화로운 학교를 만들려고 합니다.
현재 학교 구성원간의 관계는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보직교사와 평교사,  평교사와 관리자 등 수직적인 관계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차름학교는 학생에게 배움과 생활의 전 과정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고, 학생의 배움 속도에 따라 기다릴 수 있는 교사문화를 실천하고 이 문화를 지킬 조직 을 만들 것입니다. 또한 모든 교사가 수평적이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고 지켜나갈 것입니다.
학부모는 민주적인 방법에 의해 다수의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를 통하여 교육활동을 포함한 학교의 전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문화와 제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학부모들도 학교의 한 구성원으로써 역할이 부여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각 가정의 상황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이고 전체적인 방식은 지양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육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현재 제가 근무하는 경진학교를 예로 들자면, 98년, 개교 이듬해에 아이들과 함께 지역사회에 체험학습을 나갔을 때와 지금 체험학습을 나갈 때 지역사회 주민의 반응은 매우 다릅니다. 초기에 체험학습을 나갈 때보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이나 배려가 눈에 띠게 좋아졌습니다. 차름학교의 ‘지역과 함께하는 교육’은 이러한 체험학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타 교과까지 가능한 많은 수업을 지역사회 속에서 진행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하여 아이들이 지역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가 아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졸업 후 스스럼없이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지역문화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자연과 함께하는 교육을 하고자 합니다.
모든 대안학교들처럼 차름학교도 자연과 함께하는 교육을 하려고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혹서기나 혹한기를 제외한 매일 텃밭이나 주변의 산과 들로 나가 농사를 짓거나 산책을 하면서 자연과 대화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상 자주 듣는 두 질문에 대한 답으로 차름학교의 모습을 간단하게 그려 보았습니다. 차름학교가 그리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거나 이후 질문과 대답시간에 혹 질문이 들어오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인간과 자연간의 대화 단절, 인간과 인간간의 대화단절이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삶의 파괴를 가져오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학습되었건, 사람이 스스로 가지고 나왔던 현상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서로의 대화를 단절시키는 요즘, 명상과 철학적 성찰, 생태학적 복원운동, 대안학교와 대안 삶 여러 형태의 운동들이 대화의 통로를 열고자 하는 모습들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들조차도 같은 인간이면서도 엄청난 대화단절을 지닌 채 살아왔던 정신지체ㆍ정서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간극을 최소화하고자하는 노력은 너무나 미미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차름학교가 이 간극을 줄일 수 있는 작은 힘이 되기를 원하며 이상으로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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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순 외(1996). 실학의 철학. 서울 : 예문서원.
김지하(1984) 밥 김지하 이야기 모음 : 분도출판사.
김교빈 외(1993). 동양철학에세이. 서울 : 동녘.
함석헌기념사업회(2001). 함석헌 사상을 찾아서. 서울 : 삼인
루돌프슈타이너(1999, 양억관 역). 초감각적 세계인식. 서울 : 물병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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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영 2012.07.17 10:18
    학교....가 얼마나 꼬장꼬장하면 대안학교가 생겨나게 되었네요..
    저도 지금 있는 자리가 너무 꼬장꼬장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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