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방송을 통해 본 심샘

공중부양의 인문학 사러 가기

(*.193.18.178) 조회 수 393 추천 수 0 댓글 0

  저는 2014년 부산교대 대학원 인문학과(정확하게는 인문교육과) 석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그후 약 3년동안 일산에서 부산까지 먼 길을 오갔지만 함께 공부하는 분들과 학문의 길을 인도해 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단 한번의 고단함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3년간 일산과 부산을 오가면서 다섯 학기를 모두 마치면서 석사 논문 "사람과 노동에 관한 인문학적 고찰"을 제출했습니다. 내용은 평소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보면서 고민하고 생각하던 사람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심 선생님은 어디가서 누구의 말을 더 듣지 말고, 선생님 이야기를 하세요. 그게 더 나은 것 같아요."

   당신은 기억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박사 과정에 대한 의논을 하러 갔을 때, 당시 지도교수셨던 이미식 교수님의 이런 격려를 하셨습니다. 그 말씀 덕에 당시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던 박사과정(철학과)을 포기하고 글을 좀 써 보리라 다짐했습니다. 이미식 교수님의 과분한 격려에 힘입어 거의 20년간 학부모들과 소통한 글, 나름대로 특수교육의 현주소를 생각하며 쓴 글, 거기에다가 석사논문 내용을 보충하여 집필한 책이 바로 『공중부양의 인문학』입니다.

 

   『공중부양의 인문학』을 쓰기 위해 좋은 책들을 많이 참고하고, 인용했습니다. 이것들을 모두 참고문헌으로 넣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발매가 된 이후에야 아쉬움이 남더군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공중부양의 인문학』을 읽은 독자의 이해를 좀 더 넓히기 위해, 참고한 책 중 몇 권을 수 주에 걸쳐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앎의 나무』에 이어 오늘 소개할 책은 제게 언어의 쓰임에 대해 눈뜨게 해 준 비트겐 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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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비트겐슈타인 선집 4)

  철학적 탐구(비트겐슈타인 선집 4)

 

  저자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역자 | 이영철

  출판 | 책세상  

  출간일 | 2006.5.1.

 

   트겐슈타인 생전에 자신의 의사로 공식적으로 출간한 책은 『논리철학논고』(이하 『논고』) 한 권입니다. 나머지 『쪽지』, 『청·갈색책』, 『확실성에 관하여』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 등은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이후에 제자나 동료들에 의해 편집·출간된 유고 서적입니다.

  제가 교사여서인지 몰라도 "비트겐슈타인"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그의 교사생활입니다. 그는 삼십대 초반에 약 6년간 오스트리아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20세기 가장 천재적인 철학자, 아니 제가 아는 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철학 중의 하나인 비트겐슈타인의 교사생활은 실패와 불행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는 수업에 열정적이었지만 당시 학생들과 학부모의 환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그가 교사생활을 하던 곳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있었겠지요. 당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 마을 사람들 중 3/4만 진정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을 보는 눈이 다른 이와는 매우 달랐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학생을 체벌하던 중 한 학생이 쓰러지면서 교직을 떠나게 됩니다. 지금의 눈으로 비트겐슈타인을 재단한다면 아마 쓰레기 교사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아버지의 사망과 상속재산의 처리, 1차대전 참전, 수도원 수사가 되려는 시도, 정원사로 일하기 등 그의 삶을 돌아보면 그가 세상을 보고 사람을 만나는 방식은 무척 다릅니다. 여하튼, 비트겐슈타인의 인간적 삶의 모습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지만 매우 특별한 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트겐슈타인의 저서는 크게 전기의 『논고』와 후기의 『탐구』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굳이 끼워 넣어야 할 것이 있다면 『철학적 의견』, 『청색책』, 『갈색책』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 중 『청색책』·『갈색책』(줄여서 『청갈색책』)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논고』에서 『탐구』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가교와 같은 책입니다.

 『탐구』는 그의 전기 사상의 집약체인 『논고』를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탐구』는 『논고』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의 머릿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4년 전에 나는 나의 최초의 저서 『논리철학논고』를 다시 읽고 그 사고들을 설명할 기회를 가졌다. 그때 갑자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옛 사고들과 새로운 사고들을 함께 출판해야 할 것이라고; 후자는 오직 나의 옛 사고 방식의 배경 위에서 그것과 대조함에 의해서만  올바른 조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내가 16년 전에 다시 철학에 몰두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내가 저 첫 번째 책에 수록되었던 것 속에서 중대한 오류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탐구』 머리말 중)

  『탐구』는 『논고』에서 펼쳤던 그의 철학적 견해가 수정·변화된 것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 머리말의 내용처럼 『탐구』는 『논고』를 쓴 이후 16년동안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한 오류들을 담으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탐구』와 『논고』의 공통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두 저서 모두 철학의 본성은 언어의 문제이며 "철학은 언어 비판"이라는 공통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탐구』에서는 『논고』에서처럼 그 언어를 단일한 원리, 본질로 보지 않고(그림이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용과 맥락에서 이해하려 했다는 점(언어 게임)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탐구』는 비트겐슈타인이 출간을 위해 수차례 수정을 거쳤으며 출간을 위해 출판사의 승낙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출간하지 못하고 1951년에 사망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탐구』는 생전에 비트겐슈타인이 출간하려던 내용을 1부로 하고, 2부는 그의 제자인 리스(R.Rhees)와 앤스콤(G.E.M. Anscomb)이 비트겐슈타인의 유고 원고를 바탕으로 현재와 같이 재구성한 것입니다.

 

   『탐구』는 보통의 주장하는 글처럼 한 주제를 가지고 설명한 후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탐구』는 1부와 2부로 나뉩니다. 1부는 1번부터 692번까지 번호를 매기면서 마치 메모나 잠언처럼 구성되어 있고 2부는 ⅰ에서 ⅹⅲ까지의 번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 각 번호 뒤에 소제목이 붙거나 절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짤막한 이야기가 갑자기 나타나서 읽는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일쑤입니다. 때문에 『탐구』를 읽을 때는 정말 많은 집중이 필요합니다. 저도 세번째 읽으면서야 '아~'라는 말이 나오더군요.(부산교대를 오가는 케이티엑스에서.^^)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은 『탐구』를 쓰면서 왜 이렇게 구성했을까요? 아마도 지금까지의 철학이 보여줬던 어떤 체계성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상의 그 어떤 책보다 『탐구』의 서평이나 리뷰를 쓰는 것은 어렵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탐구』의 본문은 번호로 매겨진데다 글의 내용은 일반적인 서술과 다르고, 수많은 유비(類比)와 가상의 사례가 나옵니다. 따라서 집중하지 않으면(집중하더라도..^^) 각 이야기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압축된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다시 압축하고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탐구』의 서평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도 하고싶고, 저 이야기도 하고싶고, 저 이야기를 하면 이 이야기가 연관되고, 이 이야기를 하면 저 개념이 연결되고....

   하지만 신상규는 철학사상(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2호 별책부록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에서 『탐구』의 내용을 크게 철학의 본성, 언어와 의미, 철학적 심리학으로 나눕니다. 저는 이 분류가 마음에 듭니다. 이 만큼만 분류하여 생각해도 어려운 『탐구』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은 서평에서 『탐구』 속에 보이는 철학의 본성, 언어와 의미, 철학적 심리학 등에 대한 내용을 다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탐구』를 읽으면서 가지게 된 느낌 정도만 이야기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사적언어 논쟁도 참 의미있는데..^^)

  발달장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늘 고민은 '언어'였습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도데체 언어가 무엇이기에 일정 나이가 지나면 습득이 어려울까요? 도대체 언어가 무엇인지는 알고 언어구조(Language structure)가 확립되지 않은 채 성인이 된 발달장애인에게 AAC를 들이미는 것일까?

  이런 고민에 비트겐슈타인은 답합니다.

언어는 그림이 아니라 쓰임

   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로 마무리된 『논고』에 따르면, 우리 언어의 본질적 기능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서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본질적 기능을 찾기 위해 분석적 방법을 통해 그림이론을 선보입니다. 지금의 철학이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혼란스럽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면 철학의 본질은 드러난다고 본 것 같습니다. 언어가 세계를 표상한다고 생각한 그림이론에 나타나는 것처럼 사태를 담을 수 없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결국 『논고』에서 이야기하는 그림이론은 언어에 대한 단일한 모형인 셈입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탐구』를 언어의 단일성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합니다. 『탐구』에서는 『논고』와는 달리 언어의 본질을 묻는 대신 언어의 쓰임에 대해 묻고 답합니다. 언어는 단순히 무엇을 이름 붙이는(명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언어놀이의 맥락 위에서 성립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명명하는 그 자체도 언어놀이에 기반했다고 생각하지요.

   예를 들어,

발달장애 학생에게 바나나를 가리키면서 "이것은 바나나다."라는 "이름 붙이기"를 학습시키는 상황

   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이것은"이라는 행위가 "바나나를 가리키는 행위"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언어를 통해서는 학생의 주의를 바나나로 돌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이라는 말의 의미가 전제되지 않는 한 학생은 "바나나", "노란 색", "과일", "먹는 것" 등에 대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이라는 말의 의미를 학습시키기 위해, "이것은" 이라는 말의 의미는 "말하는 이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고, 또 여기에서 "말하는", "이", "가까운"... 등의 의미는 이런 거야.. 하고 가르치려고 한다면 "이것은"이라는 하나의 말을 가르치기 위해 무한한 꼬리물기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처음 영어를 접한 학생이 "I am a boy"를 이해하기 위해 영영사전을 펼쳤을 때, "I"는 "used of a single unit or thing"라는 뜻이고, "used"는.... "of"은.... 처럼 "I"를 알기 위한 무한 꼬리물기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말은 이렇게 지시적 의미의 단순한 지시적 정의를 통한 대응관계(크게 보면, 그림이론)가 아닙니다.

  『탐구』에 의하면, 말로 어떤 표현을 한다는 것은 그 말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활동 속의 맥락 속에서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탐구』에서는 이름 붙이기도 언어의 사용(쓰임)과 맞물려 맥락 속에서 의미가 있으며, 그 맥락을 지배하는 어떤 것을 게임 즉, 언어게임이라고 합니다. (언어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언어 가족 유사성, 규칙 따르기, 사적 언어 등 다루어야 할 이야기가 정말 많지만 나머지는 직접 『탐구』를 탐구하면서.^^)

 

  그렇다면 우리 발달장애학생들에게 언어 학습(언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탐구』의 관점에서언어 학습은 단순한 1:1의 지시상황이어서는 안됩니다. 발달장애 학생에게는 더 하겠지요. 여하튼... 발달장애인과 관련된 전문가들 특히, 언어와 관련해 AAC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좀 더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언어는 이름붙이기(명명)이 아니라 쓰임입니다.(제가 이야기하면 아우라가 없으니,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입니다.)

 

언어의 쓰임에 관한 눈을 뜨게 해 준 비트겐슈타인을 존경합니다.

 

* 기타

"무릇 진보란 그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이는 법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첫 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언어에 천착했던 비트겐슈타인은 왜 이런 말을 첫 장부터 이런 말을 써 놓았을까요. 아마 세상은 진보한다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1차·2차 대전)을 목도했기 때문일겁니다.
   자연스럽게 다음 책 소개는 "과거 진보적 사상이라 여겨졌던 계몽적 이성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이 될 것 같네요.(『공중부양의 인문학』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띄엄띄엄 읽었던.)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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