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방송을 통해 본 심샘

공중부양의 인문학 사러 가기

‘나’란 무엇인가. 
-박동섭 교수님의 ‘비고츠키의 인간철학과 또 하나의 심리학’을 듣고-
 
1. “‘나’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춘기, 사람에 대한 궁금증으로 혼란스러웠던 그 시기부터 지금까지 이 질문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 때, 계절이 바뀔 때, 가정의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거나 직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때 이 질문은 늘 나와 함께 했습니다.
 
박동섭 교수님은 강의에서 비고츠키 아이디어의 핵심인 사람다움(‘본성’이라고 표현했는데요......)과 사회문화적 관계를 설명하면서 “사람의 사람다움은 자신과 타인, 다양한 실천, 그리고 사회문화적 인공물을 통해서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개체 환원주의로 사람을 설명하기보다 매개수단과 문화적 실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 즉 ‘역사적인 아이(또는 사회문화적 사이보그)’로 사람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고츠키가 본 사람의 모습에 대해 상상하면서 사춘기 지나,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도 쥐고 있는 나의 질문, “‘나’란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1988년, 대학을 갓 입학하여 사회와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만의 ‘개인 낱말 사전’을 만들어 본 적 있습니다. 몇 가지 적다가 포기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첫 번째로 올린 단어, '나'였습니다.
'나 : 나의 지나온 시간과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
여전히 제게 ‘나’에 대한 이 생각은 많은 부분 유효합니다. 온전한 ‘나’는 홀로 떨어진 지금의 ‘나’가 아니라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것들의 관계와 ‘나’가 살아 온 궤적(역사성) 속에서 ‘나’일 때 그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것들 중 특히, 사람과의 관계는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의 모습을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반드시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낳게 됩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너도/그렇다.”
나태주님의 ‘풀꽃’이라는 시는 사람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태주님은 ‘풀꽃’에서 사람을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면서 자세히, 오래보면 예쁘고 사랑스러우며 ‘너’도 그렇다고 합니다. 자세히, 오래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 생각에 자세히, 오래 본다는 것은 그냥 빤히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세히 오래 본다는 것은 그가 함께하고 있는 ‘관계’와 걸어온 ‘궤적(역사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사람, 더 나아가 ‘어떤 것’)를 온전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잘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박동섭 교수님의 ‘비고츠키의 인간철학과 또 하나의 심리학’에서 소개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아야 할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듯 싶습니다.
 
2. 그럼에도 “‘나’란 무엇인가.”
저는 위에서 대학 시기에 가졌던 ‘나’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그 생각은 ‘많은 부분’ 유효하다고 했습니다. 비고츠키 아이디어대로 ‘나-사람-’는 매개를 통한 관계 속의 역사적인 사람(아이)이고, 사회문화적 사이보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지만 ‘전부’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발달장애 학교에서 20년 이상 생활하였습니다. 다운증후군이나 단순한 정신지체 학생들도 있었지만 제가 교실에서 만나고 함께 생활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서장애(자폐증후군이 대부분인) 학생들이었습니다. 이 학생들과의 생활은 ‘나-사람-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발달장애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매개를 통한 사회문화적 행위 속에서 학생들(사람)을 보려 노력했지만 문득문득 ‘정말 사람에게 원래 그러한 것은 없는가.’라는 질문도 올라왔습니다. 사람 속의 사람, 매개를 통한 사회문화적 관계 속에서 사람은 어쩌면 당위성을 가진 눈으로 봤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던져 보기도 했습니다.(박동섭 교수님은 ‘개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대에서 공유하고 있는 여러 것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남는 것이 ‘개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당위성 속에 개인을 가둬 놓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해 봤습니다.)
박동섭 교수님은 ‘마리의 요리 만들기’나 혜정이의 예를 통해 장애의 기원은 사회적인 것이며 장애의 경험은 사회적인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회를 배제하면 장애의 장애성은 사라지게 된다고 합니다. 저 또한 많은 부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감각장애(시각, 청각, 지체부자유 등)의 경우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 현상이 장애로 돋보임으로 사회적 산물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회를 배제한다면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관계할 때 사람이기에 사회를 배제한다면 장애는 사라지겠지만 그와 함께 ‘사람’ 또한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장애와 능력을 개인적인(개체환원주의라고 하셨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측면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은 어떤가요? 언어는 관계 속에서 나타나 관계를 규정합니다. 관계가 없다면 모를까 관계가 있는데 그 속에서 나온 ‘장애’를 일부러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히려 장애를 바라볼 때,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장애의 현상과 한계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는 마치 무지개의 색이 나눠져 있지 않지만 나눠진 것처럼 이해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장애를 최소화하기 위한 사회적 관계는 어떠하고, 우리(장애인이 아니라 ‘우리’는)는 얼마나 적절하게 관계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장애의 최소화를 위한 적절한 사회적 참여는 장애를 가진 이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장애자, 장애인, 장애우 등 말은 변했지만 말은 실재하는 것에 대한 표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치부여와 당위성을 가능한 많이 덜어내고 장애의 개인 내적 요소(피부를 경계로 하는 것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라고 가끔 느끼게 되는 중증 발달장애 학생의 모습을 보면 이렇습니다.
“말을 통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대소변 처리가 되지 않는 경우, 의사소통이 어려워 자신의 의사를 폭력적으로 행사하는 경우, 자신의 욕구와 반할 때 도로로 뛰어드는 경우...."
모두가 관계 형성에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설혹 이 아이들이 내적 언어(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특별한’)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 내적 언어를 못 들어 관계형성에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단절은 단절인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를 배제할 수도 있지만(도로를 들어내면 도로로 뛰어 들 수가 없겠죠.) 이는 관계의 결핍을 가져와 결국 사람의 존재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치 이문구의 시 ‘새’처럼 말입니다.
“산에는 산새/들에는 들새/물에는 물새/들고 나는 새/하고많아도
울음소리 예쁜 새는/열에 하나가 드물지/웬일이냐구?/이유는 간단해
듣는 사람이 새가 아니란 거야“
예를 들었던 마리나 혜정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라도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사회문화적 실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위 몇 예의 경우 의사소통이 불가능함으로 그 이후의 과정이 불가능합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는 사회문화적 관계 속에서 온다기보다 개인이 가진 기질(마치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감기에 걸린 것과 같은)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와 생활했던 학생들을 관찰하면서 가지는 약간의 생각입니다.
 
3. “‘나’란 무엇인가.”
비고츠키의 생각처럼 사람들의 감각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말의 용법이 일치하는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감각을 느끼는 그 자체는 주관적이기도 하고 객관적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동굴의 “비유”는 비유일 뿐이지 실제는 아닙니다. 사람이 생활 속(생활 반경-지방, 국가 등)에서 말과 생리적 감각을 공유하는 것은 ‘실재’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실생활 속의 사람들은 학습되었건 학습되지 않았건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각을 객관적으로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영화가 재미있다고 하는 것은 주관적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영화는 객관성을 띠기도 합니다.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에 줄을 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로애락을 느끼고 마음을 가지는 것은 원래 있던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회문화적 실천 속에서 가지는 사회적 산물임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하지만 감정과 마음을 느끼도록 되어 있는 그 것(스스로 그러한 그 것), 언어와 관계 이전에 가지고 있는 그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마다 개인이 살아온 관계와 역사가 다르기에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만 같은 것(오감, 감정을 일으킬 개인의 물리적 조건 등)과 다른 것들(삶을 살아가는 관계와 여러 매개들)을 함께 볼 때 사람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면서 계속 궁금해집니다. “‘나’란 무엇일까.”
 
* 강의를 들은 후 조금 시간이 지나 잊지 않으려 급하게 적다보니 별 이야기도 아닌 것이 투박하기만 합니다.
** 후기를 쓰다보니 강의 잘 듣고도 박동섭 교수님이 지속적으로 이야기했던 ‘개체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기회를 내어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 함께하는 특수교육 선생님들께 박동섭 교수님의 ‘비고츠키의 인간철학과 또 하나의 심리학’은 매우 유용한 강의입니다. 많은 선생님께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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