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방송을 통해 본 심샘

공중부양의 인문학 사러 가기

사는담(談)
2019.06.06 00:14

행복한 삶

(*.177.219.93) 조회 수 475 추천 수 0 댓글 0

행복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지구에 현생 인류가 생겨난 지는 약 3~4만 년 전입니다. ‘호모 에렉투스오스트랄로피테쿠스까지 생각한다면 인류의 기원은 훨씬 전인 30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오랜 세월 지구에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신분제의 변화, ‘상품이 탄생, 과학의 발달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제레미 리프킨노동의 종말에서 인류의 변화를 에너지원의 변화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에너지원의 변화를 생각하면 인류발달과 에너지 사용과의 관계를 이야기했던 유발 하라리라는 학자(이스라엘의 인류학자)를 빼 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현생인류는 원시인류보다 60배의 에너지를 쓴다고 합니다. 그 데이터가 정확한지는 몰라도 제 생각에는 ‘600배 정도의 에너지를 더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생인류가 3~4만년 전 원시인류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생인류는 원시인류보다 더 많은 음식을 먹고(또 살을 빼기 위해 에너지를 쓰지요.), 더 따듯한 곳에서 잠을 자며, 더 편안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주에서의 편리함은 그만큼 더 많은 에너지(열량, 전기 등)를 필요로 합니다.

에너지의 사용으로 보면, 현재에도 많은 불균형이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와 부자인 나라의 에너지 사용은 수 만 년 차이를 가지고 있는 현생인류와 원시인류 사이의 그것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에너지 사용의 차이 또는 경제적 부유함과 행복함은 비례할까요?

 

저는 아프리카 여행을 두 번 했는데, 그 여행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여행을 하게 되면 저는 우리나라 과자를 조금 가져가는 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통 음식을 나누면서 정을 나눈다고 하지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음식을 장만하여 함께 나누는 것은 쉽지 않지만, 과자는 간단하게 서로 나누면서 정도 나눌 수 있습니다. 함께 과자를 나눠먹다 보면 서로 조금씩 친하게 되지요.

잠비아 리빙스턴에서 만난 오베이(obey, 이름이 조금 맘에 들지 않았지만.)’라는 택시 운전수와도 과자를 함께 나눈 적 있습니다. 너무 친절하고 성실해서 선물로 과자를 좀 많이 주고 싶었는데, 때마침 가방을 뒤져보니 그날 가지고 나온 과자가 한 봉 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냥 혼자 출출할 때 드시라고 감사의 표시로 그 과자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집에 가서 아이들과 나눠 먹었는데, 아이들이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 텐데 과자 한 봉이라니...., 숙소에 들어가서 몇 봉 더 챙겨왔어야 했는데...’

저는 오베이 혼자 먹을 줄 알고 준 것인데, 오베이는 제게 과자를 받는 순간 집의 아이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생각만으로도 큰 힘을 주는 아이들을 둔 부모였습니다. 자신은 힘들어도 자식들이 행복하다면 그 힘듦을 감내할 수 있는 우리들처럼 평범한 부모 말이죠. 오베이의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행복한 그의 가정이 떠올랐습니다.

원시인류와 현생인류, 가난한 나라의 사람과 부자나라의 사람, 인종, 나이, 장애유무를 떠나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꿈은 행복한 삶입니다. 원시에 비해, 아니,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먹고, 더 깨끗한 곳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더 행복해졌을까요? 부모님들과 아이들은 십여 년 아니, 몇 년 전에 비해 행복해졌나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프리카 잠비아에 사는 사람들보다 큰 집에서 전기청소기와 에어컨, 자동차 등 현대문명의 이기를 이용해서 더 깨끗하고 쾌적하게 사는 우리들은 과연 그들보다 더 행복할까요? 글쎄, 이것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호르몬

 

우리가 행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요? 제가 생각하는 행복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키워드가 네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호르몬입니다.

행복의 물리적 원인은 도파민과 같은 호르몬의 작용입니다. 사람은 수 만 년 간 진화를 거듭하면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이고 물리적인 토대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입니다. 사람 개인·개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하고 고유한 존재입니다. 한 개인이 곧 하나의 우주라고도 이야기할 정도로 사람이라는 개체는 독립적이고 고유합니다. 하지만 나이, 성별, 인종, 장애, 거주지 등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라는 물리적 토대는 누구나 공유하는 공통적인 것입니다.

이라는 물리적 토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호르몬의 작용에 의해 감정들이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이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인간을 유전자의 복제를 수행하는 유전자의 생존기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 말에 빗대자면, 사람의 감정은 고작해 봐야 호르몬의 작용인 것입니다.

실제 호르몬 분비와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들은 사람 몸이 만들어내는 호르몬의 작용이 구조적, 환경적 요인보다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는 사춘기를 겪는 학생들의 모습이나, 갱년기를 지나가는 중년의 사람들을 들 수 있겠지요. 또는 갑상선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호르몬의 영향력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라는 물리적 토대 위에서 다양한 호르몬에 의해 행복함이나 불행한 감정 등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감정의 원천을 호르몬만으로 특정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행복이나 불행 등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을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마구 분비시키지는 않기 때문이죠. 사람은 우리 몸과 그 몸에 물리적 토대를 둔 정신과 영혼의 혼합체이며, 그 혼합체는 다양한 구조적 상황 속에서 반응하여 다시 몸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호르몬은 그냥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다양한 관계, 그리고 그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구조 속에서 상황에 맞게 분비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뇌는 그렇게 발전해 왔지요. 예를 들어, 실제 자신에게 슬픈 상황이 아닌데도 슬픈 영화를 보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눈물이 납니다. 이것은 사람의 뇌가 사람 몸이 구조적 상황, 타인과의 관계에 적응하도록 진화해 왔고, 이는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이라는 것은 몸이라는 물리적 토대와 정신, 영혼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타인과의 구조적 관계 속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족감은 사람만이 가진 욕망과도 연결됩니다.

 

욕망

 

행복의 근원을 찾는 두 번째 키워드는 욕망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이 많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욕망의 유무입니다. 욕망과 욕구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요. 격렬한 사냥 후 잡은 사냥감을 배불리 먹은 사자는 또 다른 욕심을 내지 않고 물러납니다. 남은 고기 덩어리를 다른 동물들이 가져가든 어쩌든 크게 관여하지 않을뿐더러 작은 사냥감이 또 나타난다고 해도 더 이상 사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충분히 배불리 먹은 직후에도 맛있는 무엇인가를 또 찾아 먹기도 하지요. 심지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또 다른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기도 하지요. 이때, 몸의 요구에 의해 발생하는 배고픔까지는 욕구이지만 그것을 넘어서게 되면 이제 그것은 욕망이 되어버립니다. 사자나 사람이나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는 것 까지는 욕구이지만 배고픔을 채운 이후에도 계속 먹을 것을 찾는 것은 욕망인 것이죠.

욕구는 동물의 생존과 관련이 있으며 대부분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식욕이나 배변욕, 수면욕처럼 말이죠. 번식욕(사람의 경우 성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좀 다른 것 같습니다.)은 생존과 큰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와 그렇지 않는 이야기가 공존하는데, 제 생각에는 전자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어쨌건, 욕구는 사람 이외의 동물들도 가지는 것이지만 욕망은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행복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욕망은 동물들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 수면욕, 배변역, 번식욕을 뛰어넘습니다. 배고픔을 채운 상태가 지났는데도 시작되는 먹고자 하는 의지는 욕구보다는 욕망에 가깝습니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졌음에도 그 이상을 갈구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욕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기본적인 욕구에 기반을 둔 욕망 이외에도 더 많은 종류의 욕망들이 있습니다. 출세 욕망, 과시 욕망, 성적 욕망, 부자 욕망..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욕망들이 인간문명의 발달과 인간 개개인의 삶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문명은 발달했으니 말이죠.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신화(神話), 건축물, 비행기와 자동차, 온갖 전자제품 등은 모두 지금보다 잘 살고자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걸어가도 갈 수 있는 서울길이지만 더 빨리, 더 쾌적하게 가기위한 욕망이 비행기와 KTX 등 다양한 교통체계를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사람의 문명은 욕망의 덩어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정의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제가 행복을 한 줄로 정의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몸이라는 물리적 토대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이 변화하는 세상을 보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호르몬의 분비를 통해 욕망의 그릇을 잠시 채움으로 느끼는 만족감

여기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몇 가지 나오는데요, 앞에서 이야기했던 욕망과 호르몬, 그리고 이제 이야기할 변화입니다.

위 행복의 정의를 보면, 사람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니, 사람의 행복 또한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행복은 잠시왔다가 사라질까요? 머무르지 않고 오래오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것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 근본 속성 중 하나인 (’Insight’라고 해야 할지, ‘Seeing’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의 현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 ‘’, 이것은 행복이 가지는 휘발성에 대한 단서이자 행복의 근원을 찾는 세 번째 키워드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봐야(‘인식이라고도 하지요.)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을 볼 때는 반드시 비교를 하게 됩니다. 에 의한 비교현상으로 사람의 행복은 휘발성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을 보는 원리는 다음 그림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noname01.jpg

흑백이라서 잘 보이지 않지만 위 그림은 무지개처럼 삼원색이 연결된 색띠의 한 부분입니다. 왼쪽의 보라색에서 시작해서 점점 빨갛게 되다가 노란색으로, 그리고 다시 파랑색을 거쳐서 보라색으로 이어지는 그림이지요.(원래 색은 빨강, 노랑, 파랑 삼원색이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검정은 색이 아니라 그냥 색 없음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무지개처럼 여러 색이 펼쳐진 공간을. 그런데 이 색띠에서 노란색을 찾아본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노란색의 범위를 정밀한 자로 재어 본다면, 아마 백이면 백, 모든 사람의 범위가 다를 것입니다. 무지개에서 노란색의 범위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정확한 답은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르게 그 범위를 정하겠지요. 하지만 노란색이라는 색을 가지고 타인과 소통할 때, 서로 다른 노란색의 범위로 인해 소통이 어려울 정도는 아닙니다. 무지개에서 노란색이 어디 있는지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요. 이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물리적 토대인 몸은 수 만 년 간 나 이외의 타인(‘호모라는 속과의 생물, 즉 인간)과 생물학적 토대를 공유하면서 진화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노란색을 볼 때 수 만 년 간 공유해 온 이라는 생물학적 경험을 통해 다른 색과 구분하면서 노란색을 찾아내고 타인과 그 경험을 공유하며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본다는 현상이 단순히 한 대상(위의 예에서는 노란색’)을 떼어 내어 보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가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 비로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 비로소 보는 것이라니 무슨 말인지... 말장난 같이 느껴집니다.

자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이 모두 노랑색이라면, ‘노란색이라는 개념이 생길 수 있을까요? 이건 어떤가요? 세상의 모든 사람의 성()남자하나밖에 없다면, ‘남자라는 개념이 생길 수 있을까요? 이것은 어떤가요? 앞면만 있거나 뒷면만 있는 동전이 있을 수 있을까요? 노란색이 있다는 것은 다른 색이 있다는 것이고,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남자 이외의 다른 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동전의 앞면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뒷면이 있다는 이야기고요. , 우리가 (무지개) 색띠에서 노란색을 본다는 것은 노란색과 다른 여러 색들을 보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는 것 이외의 여러 현상, 상황, 생물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겨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반드시 겨울이외의 계절을 전제하고 느끼며 알고 있기 때문에 겨울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세상 모두에 겨울만 있다면, ‘에 대한 설램도 봄꽃에 대한 기억도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변화

 

우리가 본다.’는 것은 반드시 비교를 통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온갖 감각을 통해 세상을 비교하고 점검하면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보는 것이 개인마다, 개인의 상황(구조)마다 다 다릅니다. 그것이 비록 똑같은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밥 한 공기가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 많은 것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너무 적은 양일수도 있습니다. 돈이나 집, 자동차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같은 사람의 같은 경험도 처해진 구조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연인과 함께 뛰면서 본 바닷가의 석양과 애인과 헤어진 다음날 본 바닷가의 석양은 다른 색이지요.

이렇게 사람마다 비교하고 점검하는 개인의 상황(구조)이 다른 것은 기본적으로 세상은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연인과의 관계가 영원할 것 같지만, 다양한 주변 환경의 변화 그로인한 개인 내적인 변화로 인해 그 관계의 모습은 조금씩 변화하지요. 연인뿐만 아니죠.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으며, 영원할 것 같은 우리 현재의 삶은 마치 초고속 열차에서 창밖으로 보는 풍경처럼 늘 빠르게 지나가 버립니다. 기어이 멈춰진 풍경을 보겠노라 두 눈 부릅떠 봐도 삶은 이내 지나가고 기억 속의 회고로만 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변화, 이것은 행복의 근원을 찾는 네 번째 키워드입니다.

 

행복의 휘발성

 

호르몬, 욕망, , 변화, 이 키워드를 조합해보면

몸이라는 물리적 토대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이 변화하는 세상을 보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호르몬의 분비를 통해 욕망의 그릇을 잠시 채움으로 느끼는 만족감

이라는 행복의 정의가 다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어쩔 수 없이) 세상을 비교해야만 가능합니다. 본다는 것은 비교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죠. 개인마다 비교를 기반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보는 것이 같다고 하더라도 각 개인이 처한 구조와 환경에 따라 비교의 대상은 판이하게 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개인이 느끼는 욕망은 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동일한 사람이 보는 같은 현상일지라도 그것을 보는 시기와 환경, 구조에 따라 욕망이 채워진 만족감(행복)을 다르게 느끼는 것입니다. 현재의 구조와 조건에서 가 행복을 느꼈다고 해서, 내일의 구조와 조건 속에서 도 반드시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일은 내일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구조와 조건이 있는 것이죠. 여기에서 행복의 휘발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은 수시로 변하는 구조와 환경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욕망을 어느 정도 조절하느냐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래 돌아서 왔지만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채우느냐에 달려있겠지요.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욕구와 욕망의 차이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동물이 생존하기 위해서 욕구는 채워져야 합니다. 욕구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죠. 반면, 욕망은 동물의 생존 자체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도 동물이니 욕망 없이 욕구만 충족되어도 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변화하는 세상을 비교를 통해 보기 때문에 사람만이 가진 .욕망은 깨진 독처럼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성질을 가집니다. 따라서 이럴 때 욕구와 욕망은 비교적 채워질 것입니다.

욕구는 채워져야 하며, 욕망은 절제되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굉장한 차이지요. 욕구는 ’(식재료, 생산자 등 타자)에 의해 채워지는 것이지만, 욕망은 반드시 스스로의 절제에 의해 비움과 채움이 결정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공지 "사람을 잇는 교육"의 모든 글은 저작... 2015.05.29
235 시(詩) 그 속 2012.12.19
234 사는담(談) 배우고 가르치는 인연 file 2012.12.16
233 사는담(談) 고르착에게 묻고 싶다. file 2012.12.06
232 사는담(談) 보낼 건 보내고, 비울 건 비워야지.. 2012.11.30
231 시(詩) 예쁜 사람 1 2012.11.10
230 사는담(談) 거위벌레의 알은 어떻게 되냐구요... file 2012.09.14
229 사는담(談) 퇴원 2 2012.08.14
Board Pagination Prev 1 ...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 57 Next
/ 57

  • 교육 이야기
  • 심돌이네
  • 자폐증에 대하여
  • 자료실
  • 흔적 남기기
  • 작업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