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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우리가 알고있던 이성에 대한 새로운 통찰

posted Jul 22, 2020 Views 37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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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독자들이 『공중부양의 인문학』을 "특수교사의 에세이"가 아닌 "사람 속에서 발견한 인문학"으로 읽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망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 스스로도 "장애학생을 가르치는 특수교사"로서의 저를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목처럼 제대로 공중부양 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에 관한 내용으로부터 좀 더 멀찌기 떠 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요. 생각해보니, '어떻게 하면 책이 좀 팔릴까'하는 얕은 생각으로 책에 '장애'를 각인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사회의 훈훈함을 기대하고 '장애인 생산' 마크를 큼직하게 찍은 물건처럼 말이죠.

  내심 "장애"를 내세워 책 팔 생각을 했으면서도 독자들이 "특수교사의 에세이"가 아닌 "사람 속에서 발견한 인문학"으로 읽기를 원했다니 참 이율배반적입니다. 차라리 '장애를 많이 느끼는 학생들과 그들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사람과 노동"에 관한 이야기만 보강해서 한 권의 책으로 묶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랬다면 한겨레신문에 인터뷰가 실리지도 않았을테고, 지금과 비교해서 책도 거의 팔리지 않았겠죠. 사람과 노동에 관한 무명 작가의 소리를 듣고싶은 사람은 없으니 말이죠.^^

 

  여하튼, 『공중부양의 인문학』을 쓰면서 참고한 서적을 몇 주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마뚜라나의 『앎의 나무』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소개했는데요, 오늘 소개할 책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입니다.

  『계몽의 변증법』은 과연 "부정의 부정은 긍정인가?"라는 생각, 그리고 공중부양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는데 많은 도움을 준 책입니다. 고백하자면, 좀 어려워서 완독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계몽의 변증법』이 주는 느낌과 아도르노의 철학을 아는만큼(읽은 만큼) 소개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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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비트겐슈타인 선집 4)

  계몽의 변증법

 

  저자 | 테오도르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역자 | 김유동

  출판 | 문학과지성사 

  출간일 | 2001.8.14.

 

   도르노는 열 네살에 벌써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다고 알려질 정도로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에 못지 않게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철학적으로 대성했지만 그의 철학엔 음악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미메시스"에 관한 아도르노의 견해도 음악을 통해 예술적 감각이 많은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계몽의 변증법』을 좀 더 쉽게 읽으려면 그의 이론을 간단하게나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도르노의 철학이 『계몽의 변증법』, 『부정 변증법』, 『미니마 모랄리아』 등의 책과 수 많은 논문들에 녹아 있는 것이라서 "간단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키워드를 살펴보면서 『계몽의 변증법』으로 조금 쉽게 들어가는 길을 찾아 보겠습니다. 실은 이 키워드가 『계몽의 변증법』과 그의 여러 저서, 논문 등 그의 철학을 관통하기는 합니다만.....

 

  새로운 종류의 야만 (사)물화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로 진입하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로 전락하는가? -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계몽의 변증법』 서문에서 아도르노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여기에서 과연 아도르노가 바라본 "새로운 종류의(형태의)" 야만이란 것은 무엇이고, "진정 인간적인 상태"란 무엇일까요? 저는 아도르노를 이해하기 위해 꺼낸 첫 키워드를 이 질문 속 "새로운 형태의 야만"에서 시작합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은 진보했습니다.(정확하게는 변한 것이죠.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가늠자는 "변화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떤 방향이든, 어느 순간이든 '세상이 지속적으로 변한다.'고 믿으면 진보고, 세상이 변하지 않거나 특정 방향으로 또는 특정 기간에만 변한다고 믿으면 보수입니다. 제 생각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예리하고 지난한 관찰을 통한 발견과 창의적인 발명을 통해 자신을 속박하는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왔습니다. 그로 인해 현대의 인간은 지구상의 어떤 생물보다 빠르게 달리거나 날 수 있고, 땅을 잘 파며, 어떤 생물보다 효율적으로 헤엄칠 수 있습니다. 천둥 벼락이 두려워 하늘을 향해 빌며 동굴 속에서 떨어야 했던 원시 인류에 비하면 현재의 인간은 거의 신(神)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분제 폐지, 노예해방 등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속박하는 여러 제도와 관습을 타파하면서 자유와 인권을 신장시켜 왔습니다.

  이렇듯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사회, 자신을 둘러싼 자연 등을 변화시킨 주체가 인간이지만 그 진보의 방향이 늘 인간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플라스틱은 지구와 인류 전체의 파멸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화력, 핵 등 여러 에너지원의 개발과 발전은 다양한 문명의 이기를 만드는데 기여했지만 이 또한 지구 파멸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신분제 타파로 평등한 사회가 되었지만 여전히 정규직과 비정규직, 부자와 빈자라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합니다.  또한 부의 불균형으로 한 쪽에선 죽을만큼 배부르지만, 또 다른 쪽에서는 배고파 죽는 일이 매일매일 발생합니다. 수 많은 사람이 전쟁으로 죽기도 합니다.  진보하는 인간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형태의 야만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새로운 형태의 야만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요?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또... 맑스(Karl Marx)나 루카치(György Lukács)의 이야기까지 올라가야 하는데요.. 흠.. 저도 이분들의 철학을 자세히는 모르니까... 그냥 아도르노의 "새로운 야만"과 관련된 루카치 이야기만 좀 하겠습니다.

  루카치는 맑스의 상품 물신숭배론과(상품에 대한 내용은 『공중부양의 인문학』에도 잘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짐멜의 돈에 대한 생각을(이것도 『공중부양의 인문학』에 나옴.^^) 수용하여 (사)물화(Verdinglichung)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셀 수 없는 질적 가치는 없어 보입니다. 현재 미국이든 중국이든 모든 사회에서는 스마트폰, 텔레비전과 냉장고 같은 상품뿐만 아니라 노동력, 지능 등 인간 사회의 모든 질적인 것들도 측정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그 어떤 질적 상황도 양화(量化) 할 준비가 되어 있지요.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는 기쁘거나 슬픈 마음조차 "1도 없다."며 양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괴로움의 정도, 아픈 정도를 수치로 표현하기도 하지요. 이렇게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은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고, 계산 또는 계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합리적인 원리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 전제, 물화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루카치는 물화의 근거를 상품에서 찾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을 소외시키며 (사)물화된 사회로 빠져드는 것이 아도르노가 이야기했던 "새로운 형태의 야만"일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형태의 야만을 발생시키는 사물화는 도대체 왜 발생할까요? 이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아도르노를 이해하는 두번째 키워드인 "(도구적) 이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물화의 본질 (도구적) 이성

 

  사물화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루카치는 오직 플로레타리아와 그 전위당에 의해 사물화를 공고히 하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물화의 근거가 상품에 있으니 그 상품과 관련된 구조를 바꾸면 사물화된 자본주의 사회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루카치의 이런 생각은 지금 관점에서 보기엔 좀 오래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사물화가 노동자 계급의 전위당에 의해 해소되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입니다. 맑스사상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한다고 주장하는 중국을 보면 알지요. 오히려 중국이야말로 사물화의 극단을 달리는 국가로 보입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현재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계급의 전위당을 만들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세상인 이미 그것까지 해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루카치의 사물화와 그 극복은 사람만을 중심으로, 상품을 매개로한 사람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역사 해석을 인간에게로 한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역사를 인간의 것으로 국한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 작용하는 자연사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여기에서 자연이란 말은 그냥 산천초목이 아닙니다. 아도르노에게 자연은 동일성의 원리로 수량화되고 계량화되며 배제된 "비동일자"가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쨌건, 인간의 역사로만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자유를 확장해 왔지만,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을 억압하고 지배해 왔지요. 그리고 아도르노는 이런 지배(사물화)의 본질을 상품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이성(도구적 이성)에 있다고 봅니다. 진보와 억압의 변증법이 펼쳐지는 장은 바로 인간의 주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교환을 위한 계산의 합리성 그 자체는 도구적 이성의 극단적 예입니다. 이성이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을 주체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성에 의한 계몽은 필연적으로 타자(자연과 인간)를 지배하게 됩니다. 자연을 지배하려는 이성은 대상의 질적 의미를 제거하고 양적 단위로 통합하여 사고합니다. 결국 사물화의 본질은 인간이 가진 (도구적) 이성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인간적 형태로 가는 길 미메시스(Mimesis)

 

  자, 이제 아도르노를 이해하는 세번째 키워드까지 왔는데요, 미메시스((Mimesis)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간 자체도 "~을 위한 매개"로 위치합니다. 도구적 이성이 도구적 인간을 만들죠. 아도르노는 이것을 "주체의 소멸", "주체의 사물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관리된 사회"라고 부릅니다. 관리된 사회는 언뜻 보기에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비합리적입니다. 왜냐하면 관리된 사회는 교환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관리된 사회에서는 교환할 수 없는 것들도 교환 가능하도록, 실제 그것이 가진 가치를 동일하게 끌어내립니다. 그리고 짐멜(Georg Simmel)에 의하면 그 매개는 돈입니다.

  관리된 사회의 억압은 광범위하고 보편적이고 보이지 않으며, 의식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에 맞서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바리케이트를 세울 수 있었던 시대는 행복했다. 억압의 전능화와 그 불투시성은 같은 것이다. - 아도르노 『수업이론에 대한 고찰(Reflexion Zur Klassentheorie)』

  이렇게 견고하게 물화된 세계를 극복할 방안으로 아도르노는 미메시스((Mimesis)적 경험과 사유를 이야기합니다. 미메시스는 그리스어로 "모방"(복제Copy가 아닌 재현Representation)을 뜻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좋은 미메시스는 대상의 본질을 잘 드러냄으로써 대상에 대한 인식을 넓힐 수 있고, 이를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미메시스는 대상에 대한 모방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미메시스는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대상)의 친화관계, 그러니까 주체가 인식 대상에 대한 모방을 넘어 그와의 동화(同化)로까지 확대됩니다.

주체는 미메시스를 통해 자기 자신을 타자화시키면서도, 주체를 전면적으로 해체하거나 폐기하지 않고, 주체와 분리되지 않은 방식으로 객체에 동화된다. -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우리는 과학과 이성이라는 눈으로 타자를 보지만 이는 늘 폐쇄성과 배타성을 내포합니다. 미메시스적 경험은 주체 자신이 가진 도구적 이성이 가진 동일성의 원리를 통찰하고 부정했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럴 때 주체는 "주체 속에 있는 자연"을 기억하며 진정한 자연과의 화해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미메시스적 경험을 『공중부양의 인문학』에서 "물듦"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서평을 위해 너무 이곳 저곳을 수박 겉핥기로 찾아다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부산교대 대학원을 다닐 때 아도르노에 대해 너무나 깔끔하게 명강의를 해 주신 김종기 교수님(현 부산 민주공원 김종기 관장님)이 이야기하셨던 "『계몽의 변증법』을 관통하는 명제"를 소개하며 서평을 마치려고 합니다.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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